이미지 크게보기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달 29일 인천공항에서 탑승수속 업무를 담당하는 시간선택제 일자리 우수기업 ‘에어코리아’를 방문해 시간선택제 근로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고용노동부 제공

⑧ 시간선택·유연근무제 ‘정착 절실’

불이익당할 것 같다는 불안감… 제도는 시행됐지만 사용 못해
공공부문근로자 중 3만1659명… 3년내 전환형 시간선택제 원해
사용자의 미안한 마음 없애야… 시간선택제 활용 늘릴 수 있어

한 중견기업에 근무하는 A 씨는 얼마 전 임신 사실을 알았다. 결혼 후 7년 만에 생긴 아이라 가족들과 함께 기쁨을 나눴다. 임신 초기 사무실에 앉아만 있으면 졸음이 쏟아졌고, 혹시 아이에게 안 좋은 영향을 주지 않을까 염려됐다. ‘단축근무’를 신청하고 싶었지만 눈치가 보여서 망설여졌다. A 씨는 “내가 하던 일이 동료에게 넘어가면 미안할 것 같았고, 혹시나 유난스럽다거나 회사생활 잘 못 한다는 등의 안 좋은 이미지가 생겨 회사생활에 지장을 받지 않을까 걱정됐다”고 말했다. 출산휴가로 주어지는 3개월도 눈치를 보며 쓴 동료 여직원들을 떠올리면 출산 후 육아휴직이나 전환형 시간선택제 사용은 ‘언감생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탑승수속 서비스기업 ‘에어코리아’는 2014년부터 여성 직원의 경력단절을 막고 여성 인력 활용을 위해 시간선택제를 도입했다. 정규직 근로자는 육아휴직 종료 후 시간선택제 근무로 최대 2년간 전환할 수 있다. 현재까지 20명의 직원이 ‘전환형 시간선택제’를 활용했다. 처음부터 시간선택제로 일하는 ‘신규채용형’ 근로자는 250명에 달한다. 신규채용형 시간선택제 근로자는 입사 1년 후 본인 희망 시 전일제 근무로 전환할 수 있다. 에어코리아 관계자는 “일·가정 양립 제도 시행으로 숙련인력의 이직을 방지하고 휴직자의 복귀율이 올라갔다”며 “기업의 이미지가 좋아지고 직장 만족도가 높아져 생산성도 향상됐다”고 말했다.

우리나라 일터 곳곳에 일·가정 양립을 저해하는 문화가 여전히 존재하지만, 최근 ‘시간선택제’나 ‘유연근무제’ 등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9시에서 6시까지’로 대표되는 틀에 박힌 근무 형태를 탈피해 ‘생애 맞춤형 근로시간’을 설계하고, 임신·출산·육아·자기계발 등을 병행하려는 근로자가 늘고 있기 때문이다.

근로자는 고용주 눈치를 보고, 경영자는 유연한 근로시간이 장기적으로 근로자의 생산성을 높인다는 인식을 갖지 않는 게 일반적이다. 육아휴직, 임신기 근로시간 단축 제도, 전환형 시간선택제 등 우리나라의 일·가정 양립 제도는 선진국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수준이지만, 불이익을 당할 것 같다는 불안감 때문에 근로자는 이런 제도를 제대로 찾아 쓰지 못하는 현실이다.

고용노동부가 공공부문 근로자를 대상으로 ‘전환형 시간선택제’에 대한 수요조사를 한 결과, 조사 대상 30만1533명 중 10.5%인 3만1659명이 3년 이내 전환형 시간선택제 활용을 원했다. 이 중에는 30대 근로자 비중이 50.9%로 가장 높았다. 성별까지 따지면 30대 여성이 29.6%, 30대 남성이 21.3%, 40대 남성이 11.9%였다.

특히 3년 내 활용을 원하는 3만1659명 중 ‘20% 이상의 임금이 줄어도 쓸 의향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한 사람도 39.4%(1만2473명)에 달했다. 전환형 시간선택제 활용 사유로는 ‘육아 또는 보육’(51.3%)이 가장 많았고, ‘학업 및 자기계발’(14.0%), ‘임신’(7.4%), ‘건강’(6.8%) 등이 뒤를 이었다. 수요가 가장 높은 30대의 경우 ‘육아 또는 보육’으로 인한 일·가정 양립을 위해 시간선택제를 원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단축하고 싶은 근무시간은 2시간 이하가 52.5%로 가장 많았고, 단축기간은 6개월∼1년 미만이 38.0%로 가장 많은 것으로 조사됐다. 이 정도의 근무시간 단축만으로도 직장생활을 포기하지 않고 육아 문제를 일정 부분 해결할 수 있다는 의미다.

최근 잡코리아 조사에서도 기혼 직장여성 734명 중 31%가 ‘회사에 가장 바라는 출산·육아 관련 복지’로 ‘출퇴근 시간을 자유롭게 정할 수 있는 유연근무제’를 꼽았다.

물론 전환형 시간선택제를 택하기에는 △이 제도가 본인의 업무 형태와 맞지 않거나(48.4%) △임금 감소가 우려된다(30%)는 부정적인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사용을 원해도 △동료 업무 과중(32.9%) △인사상 불이익(20.5%) 등이 우려된다는 대답도 적지 않았다. 이 때문에 ‘실제로 시간선택제를 활용해 본 적이 있다’는 근로자는 0.7%(2196명) 수준에 그쳤다.

정부 부처나 공공기관, 지방자치단체·지방공기업 등 조사 대상 기관 902곳 중 40.2%인 363개 기관에서 시간선택제를 운영하고 있지만, 실제로 이를 활용한 사람은 소수였다.

구자현 노사발전재단 일문화개선팀장은 “전환형 시간선택제 근로자의 업무 공백을 대체 인력 채용이나 추가 인력 확충을 통해 해결하지 않는다면 결국 제도를 활용하는 근로자가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며 “시간선택제 활용을 늘리기 위한 해법은 추가 인력 채용이 이뤄져 근로자가 미안한 마음을 가지지 않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구청이나 중앙부처 등 공공기관에서조차 육아휴직 등으로 업무 공백이 생겨도 인력 충원이 전혀 이뤄지지 않아 다른 직원이 육아휴직을 쓴 직원을 원망하는 경우가 많다. 일·가정 양립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임에도 조직 내에선 동료에게 민폐를 끼치는 죄인이 될 수밖에 없는 현실인 것이다. 구 팀장은 “인력 운용 자체를 여유롭게 가져가려는 사업주의 노력이 뒷받침돼야 전환형 시간선택제가 활성화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김영주 기자 everywhere@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