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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 정치부장

박근혜 대통령은 약속을 소중히 여기는 정치인이다. 박 대통령이 이명박 전 대통령과 대선 후보 경선에 나서기 한 달쯤 전인 2007년 7월 펴낸 자서전에는 ‘약속’에 대한 생각이 구체적으로 나와 있다. 박 대통령은 위헌 결정이 난 신행정수도특별법의 대체 법안인 행정중심복합도시특별법을 국회에서 처리한 뒤 당내 반발에도 불구하고 약속을 지킨 소회를 미니 홈피에 올렸다. “정치인으로서 지켜야 할 가치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국민과 한 약속을 지키는 것. 그것을 한순간이라도 잊어버린다면 모두에게 신뢰를 잃고 만다.” 이어지는 자서전의 문구는 더욱 단호하다. “이 법이 통과되고 난 다음에도 한나라당이 집권하면 행정중심복합도시는 백지화되고 말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나의 사전에 약속을 깨는 일은 없다. 약속은 지키라고 있는 거니까.”

이런 입장은 2010년 1월 정몽준 당시 한나라당 대표와의 미생지신(尾生之信) 공방으로 이어진다. 정 대표는 세종시 수정안에 대한 반대론자들을 겨냥해 “정부가 일시적으로 잘못된 판단을 했더라도 올바르게 고쳐가려고 한다면 국민은 정부를 신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노나라의 미생이라는 젊은이가 애인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비가 많이 오는데도 다리 밑에서 기다리다가 결국 익사했다는 고사도 인용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미생은 진정성이 있었고 애인은 없었다”며 “미생은 비록 죽었지만 후에 귀감이 됐고, 애인은 평생 괴로움 속에 손가락질받으며 살았을 것이다”고 반박했다.

영남권 신공항이 김해공항 확장으로 대체된 것과 관련, 공약 파기 논란이 일고 있다. 2012년 11월 30일 부산 서부버스터미널 유세 현장으로 돌아가 보자. 당시 새누리당 선거대책위원회가 배포한 보도자료에 따르면 박 후보는 “앞으로 공정하고 투명한 절차를 거쳐서 최고 전문가들이 객관적인 평가를 내릴 것이다. 부산 가덕도가 최고 입지라고 한다면 당연히 가덕도로 할 것이다”고 말했다. ‘텍스트’로만 해석하면 공약을 어긴 것이 아니다. 이번 결정이 ‘최고 전문가들(40년간 세계 각지의 공항 입지를 선정·설계한 장마리 슈발리에 파리공항공단엔지니어링 수석엔지니어팀)’의 ‘객관적인 평가(1년간 가덕도와 밀양, 김해공항을 열 번 넘게 실사해 내린 평가)’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산시민들이 받아들인 ‘콘텍스트’는 오히려 반대라는 것을 박 대통령도 알고 있을 것이다.

지금 신공항 입지 선정의 적실성 문제를 재론하는 것은 영남권 시민들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입지 선정 발표 과정에서 보여준 박 대통령의 행태는 별개의 측면에서 짚어볼 필요가 있다. 정치인이 국민과의 약속을 지키는 이유는 박 대통령의 표현대로 국민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다. 그러나 심각한 상황 변화가 있거나 약속을 지키는 것이 오히려 국민과 국가에 부담을 줄 수 있다면 약속을 파기하는 용기도 필요하고 그런 용기에 국민은 신뢰를 보낸다. 박 대통령은 많은 논란과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세종시 약속’을 지켜냈다. 당시 박 대통령이 임박한 대선을 고려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정치적 필요에 따라 국민과의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리는 우리 정치 풍토의 개혁이 세종시 건설 방식 선택의 득실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확신했고, 국민도 박 대통령의 진정성에 지지를 보냈다.

국익 차원에서 보면 이번 결정은 ‘세종시 고수’와 달리 현명한 선택이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세종시’때의 진정성은 보여주지 못했다. 박 대통령이 직접 신공항 유치를 열망하던 영남권 시민들에게 진심으로 유감을 표시하고 오로지 국익을 위한 결정이었다는 점을 호소했어도 부족할 판에 청와대 대변인이 대신 나서 “공약을 파기한 것이 아니며 약속을 지켰다”고 강변했다. 마치 ‘알아서 최적의 선택을 했으니 따르라’고 지시하는 듯한 박 대통령의 행태에는 지난 3년 동안 수도 없이 지적돼온 독선과 오만, 아집과 불통의 그림자가 아른거렸다.

김해공항 결정은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신의 한 수’일 수 있다. 그러나 이미 국민 앞에 고개 한번 숙이는 것을 어렵게 생각하게 된 박 대통령이 여소야대와 임기 말 레임덕이라는 2중의 파도를 잘 헤쳐나가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갈 길은 먼데 선장 고집은 여전하다. 대한민국호(號)가 걱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