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일러스트 = 안은진 기자 eun0322@munhwa.com

고향 마을 어귀에 다리가 있었다. 이쪽 마을과 저쪽 마을에서 흘러오는 두 개의 냇물이 합쳐지는 곳이었다. 그는 다리 앞에 자동차를 세웠다.

고향에 와서도 어머니와 형이 있는 집으로 바로 가지 않고 동네 입구 자동차를 세워놓고 서성이는 것도 뭔가 마음에 불편함이 있기 때문이었다. 지난가을 그는 고향에 있는 형에게 돈 5000만 원만 변통해달라고 말했다. 평생 고향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살아온 형은 시골에 갑자기 그럴 만한 돈이 어디 있느냐고 했다. 그때 그는 그러면 땅이라도 좀 팔아서 해달라고 말했다. 그 땅은 형이 가지고 있는 마지막 터전이었다. 나중에 돈 문제는 다른 곳에서 어떻게 해결했지만, 한번 그러고 난 다음 형제 사이가 알게 모르게 서먹해진 느낌이었다. 이럴 땐 명절도 반갑지 않았다.



어린 시절엔 설날이면 정말 축제처럼 즐겁고 기뻤다. 설날이 다가오면 긴 겨울밤, 모두 깊이 잠든 새벽에 어머니 혼자 일어나 불린 콩을 맷돌에 갈아 가마솥에 두부를 만들었다. 설이 되면 가장 먼저 만드는 것이 바로 두부였다. 어린 형제들에게 가장 신나는 것은 엿을 고는 날과 떡을 만드는 날이다. 쌀엿을 고기도 하고, 입에 넣으면 그야말로 살살 녹는 수수엿을 고기도 하고, 옥수수엿을 고기도 했다.

두부를 만들고 엿을 고을 때 가장 많이 사용하는 게 바로 가마였다. 평소엔 짚을 썰어 쇠죽을 끓이던 가마에 두부를 끓이고, 엿을 고았다. 특히나 엿을 고는 일은 거의 하루 종일 걸렸다.

아침부터 불을 때기 시작한 가마솥의 엿물이 오후가 돼서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하면 누가 부르지 않아도 저마다 밖에서 놀던 형제들이 하나둘 부엌으로 모여들었다. 얼음판에 나가 놀던 형도 들어오고 뒷동산에 올라가 연을 날리던 동생도 엿물이 줄어드는 시간만큼은 서로 귀신처럼 알았다. 동네 다른 여자아이들과 고무줄놀이를 하던 여동생도 가마솥의 엿물이 줄어들 시간이면 어느새 부엌에 와 있었다.

다들 가마 아궁이 앞에 제비 새끼처럼 나란히 쪼그리고 앉아 발그스레한 얼굴로 아궁이 속의 불을 보고, 또 목을 한껏 늘여 가마 속에 졸아드는 엿물을 바라보았다. 어머니가 젓는 주걱 끝에 조청이 길게 눌어붙기 시작하면 모두 입맛을 다시며 마술쇼 바라보듯 그것을 바라보았다.

엿을 고는 날만큼이나 신나는 날이 떡을 만드는 날이다. 인절미는 커다란 안반에 양쪽에서 누가 떡을 쳐주어야 하기 때문에 마당에서 만들고, 절편과 증편 같은 떡은 어머니와 할머니가 부엌에서 만들었다.

이때에도 어린 형제들은 밖에 나가 놀다가도 마당에서 아버지가 안반에 떡을 치는 소리를 듣고 다들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찰지고도 요령 있게 떡을 쳤다. 삼촌은 제대로 하지 못해 떡메에 떡 뭉치가 고무처럼 들러붙어 떡 치는 흐름을 끊곤 한다.

지금은 절편을 기계로 뽑아 떡살 무늬가 없지만, 그 시절 절편들은 떡 위에 판화를 찍어내듯 떡살로 갖가지 문양을 찍어냈다. 어떤 때는 어린 형제들이 서로 해보겠다고 떼를 쓰며 나서기도 했다. 어머니와 할머니는 쉽게 금방금방 찍어도 무늬가 반듯하고 떡 모양도 균형이 잘 잡혀 있는데, 어린 형제들이 하면 떡살을 두 손으로 잡고 온갖 정성을 다 기울여 찍어도 무늬도 잘 새겨지지 않고 떡 모양도 고르지 않았다.

마을 어귀 다리 부근에 차를 세우고 서성이는 동안 어린 시절 겨울밤마다 형제들이 화롯가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밤과 떡을 구워 먹던 추억도 저절로 떠올랐다. 화로 위에 석쇠를 얹고, 그 위에 바짝 얼고 굳은 떡을 올려놓고, 그것이 따뜻하게 풀어지길 기다리며 어린 형제들이 할머니가 들려주는 옛날 얘기를 들었다. 그때 겨울밤마다 형제들의 간식으로 굳은 떡을 굽던 화로와 석쇠들은 다 어디 갔을까.



그가 어렸을 적, 마당에서 떡을 치고 가마솥에 엿을 고던 시절엔 지금 그가 서 있는 자리에 구멍이 뽕뽕 뚫린 철판 다리가 놓여 있었다.

“전엔 비행기가 이 위로 다녔대.”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그걸 알려준 사람도 두 살 위의 형이었다.

“비행기가 공중으로 다니지 다리 위로 다니나?”

“그게 아니라 비행장에서 비행기가 뜨고 내릴 때 말이지.”

어른들 말로도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 비행장 활주로를 아스팔트로 포장하기 전에 깔았던 철판이라고 했다. 어린 시절 철판 다리를 건널 때면 다리 위가 아니라 그 아래 물을 밟고 지나다니는 기분이었다. 주먹보다 큰 구멍이 뽕뽕 뚫린 발밑 아래로 흐르는 물이 그 위를 지나가는 어린 형제의 정신까지 어질어질 빼앗곤 했다.

그 다리 위에서 신발을 잃었던 것도 큰물이 진 다음이었다. 비가 내리다 하늘이 맑으면 가장 먼저 마르는 것이 방앗간의 함석지붕과 철판 다리였다. 다른 곳은 아직 땅이 진데도 철판 다리는 햇볕 아래 반짝 뜨겁기까지 했다. 형제가 학교에서 함께 집으로 돌아오는 길, 다리를 건너다 그의 고무신이 철판 구멍 사이로 빠졌다.

“어라, 내 신발….”

그의 발에서 미끄러진 검정 고무신은 이미 다리 아래로 떨어져 종이배처럼 빠르게 물살에 휩싸였다. 비는 이제 더 이상 내리지 않아도 물은 다릿발 중간까지 차올라 빠르게 아래로 흘러내렸다. 물 위에 떨어진 고무신도 그 물살만큼이나 빠르게 아래로 흘러가버렸다.

형제는 물 위에 떠내려가는 신발을 따라 멀리 방죽까지 따라 내려갔다. 고무신은 가끔 물속에 몸을 숨기기도 하고 떠오르기도 하면서 애간장을 녹였다. 그러다 보 아래로 작은 폭포처럼 떨어져 내리는 물과 함께 떨어진 그의 신발은 다시 물 위로 솟아오르지 않았다. 해가 질 때까지 형제는 방죽을 왔다 갔다 하며 신발이 떨어진 보 밑을 살펴보기도 하고, 행여나 하는 마음으로 아래 방죽까지 내려가 보기도 했지만 한번 눈에서 놓친 신발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응응응, 이제 어떻게 하지? 집에 가면 혼날 텐데.”

“괜찮아. 내가 집에 가서 네가 다리 위에서 미끄러져 그랬다고 얘기를 잘해줄게.”

신발을 잃었다고 그가 울고, 우는 동생을 달래다 지쳐 형까지 따라 울었다. 방죽에서 좀처럼 자리를 뜨려 하지 않는 그를 달래 저녁 늦게 형제가 방죽을 따라 올라오던 길, 해 떨어진 대관령에서 밀려오는 노을은 또 왜 그렇게 곱기만 하던지. 어쩌면 그래서 더 서럽고 슬펐는지도 모른다.

‘그때 내가 잃어버린 고무신은 무사히 바다에 가 닿았을까. 그랬다면 그 고무신은 지금 어느 망망대해를 떠돌까.’

그는 예전 철판 다리 대신 새로 놓은 시멘트 다리 위에서 오래도록 다리 밑으로 흐르는 물을 바라보았다. 지금쯤 어머니가 기다리고 계실 텐데, 선뜻 집으로 걸음이 옮겨지지 않았다.

그러다 다리 위에서 그는 한 소년을 만났다. 그가 난간을 짚고 다리 아래를 바라보자 소년도 그와 똑같은 모습으로 다리 난간을 짚고 다리 아래를 바라보았다.

“너, 이 동네에 사니?”

물어도 소년은 대답 대신 빙긋 웃기만 했다.

“왜 웃니?”

그래도 소년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상한 아이구나. 왜 말을 않니?”

“나를 모른다는 게 이상해서.”

“얘야. 네가 말을 않는데 내가 너를 어떻게 알 수 있겠니?”

아이는 어른이 묻는데도 꼬박꼬박 반말로 대답했다. 그런데 그게 또 이상하거나 기분 나쁘게 들리지 않는 것이었다.

“이상하게 생각할 거 없어. 여기 손을 짚고 다리 아래를 가만히 바라봐. 그러면 알게 돼.”

그는 아이가 시키는 대로 다시 두 손으로 다리 난간을 짚고 다리 아래로 냇물이 바짝 얼은 얼음판을 바라보았다.

“그런 채로 눈을 감아봐. 내가 열을 셀 때까지.”

그는 아이가 하라는 대로 눈을 감았다.

하나, 둘, 셋…

아이가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그도 마음속으로 따라 세었다.

여덟, 아홉, 열!

그 소리와 함께 눈을 뜨고 그는 아이 쪽을 바라보았다. 분명 옆에서 열을 세는 소리를 들었는데, 아이가 보이지 않았다.

“어디 갔지?”

“여기….”

잠시 전까지만 해도 그가 선 자리 옆에 그와 똑같은 모습으로 서 있던 아이가 다리 아래 얼음판 위에서 대답했다. 그제야 그는 그 아이가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아, 내 어린 시절의 소년아.”

그는 다리 아래의 소년을 불렀다.

“그동안 너는 어디 있었니?”

“여기. 지금처럼 네가 추억하는 것 모두 아름다웠던 꽃과 나비의 세상.”

소년이 대답했다.

“그런데 그동안 나는 왜 고향에 오가며 너를 보지 못했을까?”

“어른이 된 다음 너는 늘 바쁘기만 했으니까. 한 번도 어린 시절을 뒤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려왔으니까.”

“아, 그랬구나. 그래서 내가 너를 보지 못했구나.”

“나는 네가 세상일에 아무리 바빠도 나를 잊지 않길 바라. 나는 네가 이곳에서 자란 어린 시절의 너니까.”

“그래. 이젠 너도 고향도 잊지 않을게.”

“이제 그만 가 봐야지. 어머니와 형님이 기다리는데.”

“언제 우리 다시 만날 수 있지?”

“언제나. 네가 힘들 때, 또 기쁘고 슬플 때, 이곳에 와서 나를 부르면 돼. 여기에 나만 있는 게 아니야. 네 형제들도 친구들도 모두 너처럼 여기에 와서 어린 시절에 대한 그리움으로 자기를 불러주길 기다리고 있는 거야.”

그날 그는 그렇게 고향 마을 다리 위에서 한 소년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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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과 만나 잠시 이야기를 하던 중 그의 주머니 속의 핸드폰이 울렸다. 형의 전화였다.

“어디까지 왔나? 어머니 기다리시는데. 다른 형제들도 다 왔다.”

형은 지난가을의 일 같은 건 다 잊은 목소리로 말했다.

“예, 가요.”

그도 지난가을의 일 같은 건 다 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모든 게 넉넉하고 훈훈한 설이고, 고향이었다.

우리 어린 날의 꽃과 나비의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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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 : 동인문학상, 현대문학상, 이효석문학상, 한무숙문학상, 허균작가문학상, 남촌문학상 수상. 소설 ‘수색 그 물빛무늬’ ‘은비령’ ‘19세’ ‘아들과 함께 걷는 길’ 등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