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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주엽 / 문화부장

영국 런던의 화이트채플 갤러리에서는 ‘Electronic Superhighway(2016∼1966)’란 제목의 기획전이 열리고 있다. 지난 1월 29일 시작돼 5월 중순까지 열리는 이 기획전에는 1960년대 중반부터 현재까지 TV 미디어와 컴퓨터, 인터넷을 접목해 새로운 예술의 지평을 열고 있는 세계적 작가 70명의 작품 100점을 전시·상영한다. 기획전의 영문 제목은 1970년대 중반 백남준이 만든 용어를 갖다 쓴 것이다. 우리말로 ‘전자 고속도로’라고 할 수 있는데, 바로 인터넷이 떠오른다. 이 기획전이 백남준의 10주기인 29일 개막한 이유가 짐작이 간다.

백남준은 1974년 ‘후기 산업사회를 위한 미디어 계획’이라는 논문에서 미국사회가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고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자 고속도로를 건설하자고 제안했다. 이 전시회를 보도한 가디언지도 설명하고 있지만, 이는 백남준이 인터넷을 처음 고안해 낸 것이다. 30년 후 미국 빌 클린턴이 이를 대선 공약으로 인용했고, 백남준은 “클린턴이 내 아이디어를 훔쳤어”라는 특유의 유머로 응대했다.

뛰어난 예술가는 미래를 열어간다고 할 때, 백남준이야말로 시간을 앞서간 예술가다. 한국인 중에 세계예술사에 한 획을 그은 사람을 꼽는다면 백남준이 유일할 것이다. ‘비디오 아트’라는 분야를 열어 예술사 교과서에 올라 있다. 국내에서도 백남준의 10주기를 맞이해 다양한 행사가 열리고 있다. 그중에 백남준문화재단이 얼마 전 주최한 심포지엄이 관심을 끌었다.

백남준이 남긴 비디오 아트는 일반적인 회화나 조각과 달리 그 소재의 속성상 장기 보존에 어려움이 있다. 기기의 수명이 짧은 데다 테크놀로지도 하루가 다르게 바뀌어 리뉴얼이 문제다. 1988년 국립현대미술관에 설치된 백남준의 비디오 타워 ‘다다익선’도 1003대에 달하는 TV 수상기의 잦은 고장으로 관리에 애를 먹고 있다. 그의 작품이 설치된 전 세계 주요 미술관들도 공통된 고민을 하고 있다.

이번 심포지엄은 백남준의 생전에 함께 작업한 기술 협업자 3명이 모여 그의 작품을 어떻게 보존할지 논의하는 자리였다. 흥미로운 것은 그 스스로 작품의 소유주에게 향후 작품의 지속적 작동을 위해 작품의 정통성이 훼손되지 않는 범위에서 수정을 허락했다는 점이다. 예컨대 TV 수상기의 경우 화면 크기가 같다면 제조사가 다르거나 새로운 모델이더라도 교체를 허락했고, 그가 주로 사용한 소프트웨어인 레이저디스크 플레이어도 새로운 테크놀로지로 변환할 수 있도록 했다. 첨단 예술가로서 유연성이 돋보인다.

미국 스미스소니언박물관은 백남준의 작품 ‘메가트론’을 구입할 때 백남준스튜디오에 남아 있던 같은 모니터 120대를 전부 구입해 작품의 장기 보존에 대비했다. 독일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중고모니터를 사서 작품의 수명을 늘리고 있다. 우리는 작동하는 모니터를 수리하는 것도 예산을 이유로 미루고 있다. 백남준의 작품을 어떻게 후손에게 물려줄지를 정보기술(IT)에서 앞선 우리가 먼저 정리해 다른 나라의 작품보존에도 도움을 주는 게 세계적 예술가를 둔 나라에서 할 일이 아닐까 싶다. 그러는 데 큰 예산이 들 것 같진 않다.

ejyeob@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