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적 지문’의 힘

흔히 범행 현장에서 범인의 머리카락이 발견되면 유전정보(DNA)를 검출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머리카락의 모근이 손상될 경우 DNA 검출은 불가능하며, 모근은 짧은 시간에 쉽게 손상된다. 이럴 경우 머리카락의 화학성분에 대한 분석을 통해 범인을 찾을 수 있는데, 그것이 바로 ‘화학적 지문’(Chemical fingerprinting) 분석이다.

2013년 5월의 이른 아침 경기 여주시 가남면 다세대주택에서 성추행 사건이 발생했다. 문을 잠그는 것을 깜박하고 샤워 중이던 20대 여성 A 씨의 집에 괴한이 침입해 흉기로 A 씨를 위협하며 5시간 동안 감금상태로 성추행한 것. A 씨의 눈을 가린 채로 범행을 저질러 피해자가 범인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했고, 강간한 것이 아니라 체액도 남아있지 않았다. 경찰은 일말의 희망으로 방 안에 흩어져 있던 머리카락을 모아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감정을 의뢰했다. 그러나 설상가상으로 일부 머리카락의 모근이 훼손돼 DNA 검출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국과수 법화학과는 DNA 분석 대신 머리카락에 대한 ‘화학적 지문’ 분석에 들어갔다. 머리카락을 구성하는 탄소, 질소, 황, 수소, 산소 등 안정동위원소와 그 사람의 식성·직업 등 환경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미량의 다원소를 분석해 비교함으로써 동일성 여부를 판가름하는 것이다.

분석 결과, 현장에서 나온 머리카락은 총 세 명의 다른 사람들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하나는 피해여성 A 씨의 것, 나머지 하나는 A 씨 남자친구의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신원을 확인할 수 없는 누군가의 세 번째 머리카락이 남았다. 국과수는 해당 머리카락이 용의자의 것으로 추정된다는 분석결과를 경찰에 통보했다.

경찰은 CCTV 등을 토대로 용의자를 압축했고 이들의 머리카락을 수거해 국과수에 재분석을 의뢰했다. 그리고 용의자 가운데 자신의 혐의를 극구 부인하던 B 씨의 머리카락이 세 번째 머리카락과 화학적 지문이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결과가 도출됐다. 결국 경찰은 이를 바탕으로 B 씨의 자백을 받을 수 있었다.

국과수 관계자는 “머리카락의 DNA 정보만으로는 밝히기 어려운 성별과 흡연 여부, 직업군까지도 화학적 지문 분석을 통해 밝힐 수 있다”며 “머리카락이 한 달에 1㎝씩 자란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머리카락을 부분별로 분석하면 한 달 간격으로 그 사람의 행적을 추정할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김다영 기자 dayoung817@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