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만년필, 컴퍼스, 클립 등 다양한 문구 용품들은 이용자들과 오랜 기간 정서적 교감을 하며 디지털시대에도 명맥을 유지해 가고 있다.

문구의 모험 / 제임스 워드 지음, 김병화 옮김 / 어크로스

올해 초 ‘연필 거지’가 사회적 이슈가 된 적이 있다. 가구 브랜드 이케아 광명점에 비치된 무료 연필이 개장 50여 일 만에 동났기 때문이다. 이후 인터넷 중고매매 사이트에 이 연필을 팔겠다는 글이 올라오자 ‘국가적 망신’이라는 기사까지 쏟아졌다.

정작 이케아는 담담했다. 이 연필은 어차피 무료로 제공하는 기념품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연필 거지’ 논란은 이케아가 입점한 어느 나라에나 있었다. 영국 메트로신문은 2004년 이케아 로고가 찍힌 이 연필을 두고 ‘반드시 가져야 하는(must have)’ 아이템이라 평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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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드는 의문은 ‘연필, 이 작은 문구가 뭐길래?’다. 이제는 키보드에 상당 부분 역할을 빼앗겼지만, ‘찰리와 초콜릿 공장’을 쓴 작가 로알드 달은 매일 아침 뾰족하게 깎은 연필 여섯 자루를 들고 하루를 시작했고, ‘분노의 포도’를 쓴 작가 존 스타인벡 역시 작가 생활 내내 완벽한 연필을 찾으려 노력했다.

그들에게 연필은 인생을 표현하는 도구였고, 여전히 문구용품 하나하나에 그런 의미를 담는 이들은 존재한다. 런던 문구 클럽의 공동 창설자인 저자가 쓴 ‘문구의 모험’은 무한한 가능성과 기회를 담고 있는 소박하고 겸손한 도구지만,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인생을 걸 만큼 특별했던 문구에 대한 다양한 시각을 담고 있다.

연필과 볼펜, 만년필 등 다양한 필기구의 오랜 짝은 종이였다. ‘쓸 곳’이 없다면 ‘쓸 것’의 의미도 반감되기 때문이다. 저자가 거론하는 대표적인 종이는 몰스킨(moleskine) 공책이다. 이 이름은 여행기 작가인 브루스 채트윈에게서 왔다. 당시 몰스킨은 ‘기름을 먹인 검은 천 제본’ 정도였는데 이후 몰스킨은 전문 업체를 통해 생산되며 200년 넘게 부드러운 양피 커버와 미색 속지, 이를 묶어주는 고무 밴드로 상징되고 있다.

빈센트 반 고흐, 파블로 피카소, 어니스트 헤밍웨이 등이 썼던 것으로 알려진 몰스킨 스타일의 노트는 현재까지 명맥을 유지하며 많은 예술가나 전문가들의 품속이나 손에 들려 있다. 스마트폰과 태블릿PC가 보편화된 삶 속에서도 저자는 “이렇게 강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공책은 몰스킨 외에는 없다. 반면 허세의 상징으로 조롱받기도 하는 몰스킨은 자신이 독창적인 사람임을 과시하기 위해 사용하는 허세적 소도구”라고 말한다.

이 책의 마지막 챕터 제목은 ‘그 많던 볼펜은 다 어디로 갔을까’다. 물론 여전히 볼펜은 많다. 책상 서랍에, 양복 안쪽 주머니에, 가방 한편에 손을 넣으면 어디서 받았는지, 어디서 샀는지 모르는 볼펜 한 자루씩은 잡힌다. 하지만 이 챕터 제목이 가슴에 와닿는 이유는 데스크톱 혹은 노트북이 그들의 역할을 상당 부분 빼앗아 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책상 위에는 여전히 볼펜, 노트, 지우개, 테이프, 스테이플러, 포스트잇, 파일첩 등 수많은 문구가 존재한다.

사실 이들의 영향력은 크게 줄지 않았다. 각종 ‘스마트’한 기기들이 탄생했다고 각 문구들이 생명력을 잃은것은 아니다. 디지털 시대에 오히려 손글씨와 같은 캘리그래피가 각광받는 것은 아날로그의 외침이자 문구의 반격이라 할 수 있다.

전구가 발명됐지만 양초는 죽지 않았다. 기술의 영역에서 예술의 영역으로 용도와 의미가 살짝 바뀌었을 뿐. 마찬가지로 문구는 이성적 편리함보다는 감정적 익숙함을 앞세워 각 이용자들의 사적 영역 안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안진용 기자 realyong@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