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전원합의체’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지난 7월 24일 형사 사건과 관련한 변호사 성공보수 약정은 무효라고 판결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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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서 중심·일제시대 법리
법조인 관념으로 자리 굳혀

상고심서 하급심 ‘지도’체제
청산해야할 대표적인 잔재

광복 70주년을 맞아 각계에서 일제 잔재 청산 작업이 이뤄지는 가운데 법조계 역시 오랫동안 굳어진 잘못된 관행을 청산하는 근본적 사법개혁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특히 일제강점기의 잔재로 남아 있는 ‘조서(調書) 중심의 재판 관행’ 등을 바로잡고, 통일 이후에도 언어의 동질성이 옅어진 북한 주민들의 법정 중심 재판을 구현하기 위해 ‘의사소통의 명확성’을 담보할 장치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또한, 해방 이후 일본 법률을 모방하면서 자리 잡은 일본식 해석론이나 70년 전의 상고 시스템 등을 개선해야 한다는 제언이 잇따르고 있다.

◇법정 중심 재판 = 17일 법조계에 따르면 일제강점기의 수사와 재판은 일본어로 이뤄졌고, 통역도 제대로 제공되지 못했기 때문에 피고인의 절차적 권리가 보장되지 못했다. 당시 일본인 재판장들은 억울함을 호소하는 피고인에게 ‘수사기관에서 이렇게 진술하지 않았느냐’며 조서를 확인시킨 후 유죄의 증거로 삼는 게 일반화돼 있었다. 해방 이후에도 이 같은 관행이 이어졌고, 대법원은 1984년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에서 ‘조서를 법정에서 부인할 수 없다’는 판결을 하기도 했다. 2003년부터 사법부는 형사사건 실체에 대한 모든 심증은 법정에서의 심리에 의해 이뤄져야 한다는 이른바 공판중심주의를 강조했다. 이후 법정녹음을 시행하고 청각·시각장애인에게 국선변호인을 선정하지 않은 것에 대해 대법원이 절차적 위법성을 인정한 판결을 내리는 등 이 같은 문제가 어느 정도 개선되고 있다. 하지만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법률 지원이 여전히 미흡하고, 북한 주민과의 언어적 동질성이 옅어진 상황에서 통일 이후에도 법정 중심 재판을 구현하기 위한 장치를 사전에 대비해야 한다는 제언이 나온다.

◇일본식 해석론 청산 = 법률에 대한 일본식 해석론의 잔재도 문제라는 지적이 나온다. 해방 이후 국회는 일본 법률과 표현 등을 거의 그대로 따와 법률을 제정했다. 형식뿐 아니라 자연스럽게 일본식 해석론을 따랐고, 이는 법조인들의 관념에도 은연중에 자리 잡았다는 분석이 나온다. 법원장 출신의 한 변호사는 “일본식 해석론에는 ‘원칙적 유효, 예외적 일부 무효’ 등의 고정관념이 많이 등장한다”면서 “최근 형사사건 성공보수를 금지한 대법원의 판결이 해석론적 관점에서 본다면 보편적 정의에 근거해 예외를 허용하지 않는 독자적인 이론을 확립하려는 시도로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행정 처분 등의 법률상 이익이 있는 당사자만이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는 ‘소(訴)의 이익’ 해석을 통해 행정소송 청구 권한을 좁게 해석하는 이론 역시 일본식 해석론의 대표적 잔재라는 지적을 받고 있다.

◇사법 시스템 현실화 = 최근 대법원에서 추진 중인 상고심 구조 개편도 일제 잔재 청산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일본은 근대화 초기 생소한 서구의 사법제도를 모방해 오는 과정에서 ‘중앙 집중식’ 체제를 구축했다. 많은 사건을 중앙으로 집중시켜 소수의 상고심 법관들이 하급심을 ‘지도’한다는 차원에서 상소를 제한 없이 허용하는 성격이 강했다. 하지만 서구의 상소제도는 상고는 물론 일부 항소까지 제한하는 등 ‘상소제한의 역사’라고 할 만큼 이와 정반대였다. 중앙집중식인 일본 역시 1996년 민사재판에 상고허가제를 전면 도입했고, 상고심 법원을 이원화했다. 정작 일본을 모방한 우리나라는 70년 전 도입한 일본식 사법 시스템을 그대로 운영하고 있는 셈이다. 서울중앙지법의 한 부장판사는 “독일의 경험에서 알 수 있듯 통일 이후 법적 분쟁이 폭발적으로 증가할 텐데 19세기 일본식 사법제도로 충분히 대처 가능할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김동하 기자 kdhaha@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