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이현종 / 논설위원

“참 쉽죠?” 20년 전 ‘TV 유치원’이라는 어린이 TV프로 종이접기 코너에 나와 색종이로 재미있는 동물, 꽃 등을 순식간에 뚝딱 만들어 냈던 김영만(65) 씨가 요즘 대세(大勢)다. 김 씨가 출연한 프로그램은 33%라는 놀라운 시청률을 기록하며 ‘집밥’ 백종원 씨마저 밀어낼 정도로 인기를 누리고 있다. 재미있고 박진감 넘치는 스마트폰 모바일 게임이 차고도 넘치는데 2030세대가 60대 중반에 얼굴에 주름이 팬 종이접기 선생님에게 왜 열광하는 것일까.

김 씨에게 ‘쉽다’는 칭찬을 들으며 종이접기를 따라 했던 이 세대는 초·중·고교 시절 국제통화기금(IMF) 사태와 치열한 입시경쟁을 겪었고 졸업해서는 청년실업·‘알바’ 인생이라는 현실의 벽과 마주해야 했다.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위로받을 곳이 없었던 이들이 다시 TV에 나타난 종이접기 선생님을 만나 행복했던 그때로 다시 돌아갈 수 있어서 그저 눈물만 났다고 한다. 세상은 종이접기처럼 쉽진 않지만 그래도 내 편만 있으면 살 만하다. 정치가 국민에게 어딘가 기댈 수 있는 언덕을 만들어 주어야 하는데 종이접기 아저씨가 대신해 주고 있는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 시절 지금은 3040세대가 되어버린 당시의 2030세대는 노 전 대통령의 탈권위와 변화에 한 가닥 희망을 걸었다. 대통령 탄핵 열풍 속에 그들의 선배세대인 ‘86(80년대 학번·60년대생)그룹’을 대거 국회로 진출시키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2004년 총선에서 86세대 운동권의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 이인영·우상호·최재성·정청래 의원 등 10명이 의회에 진출했다. 그래도 대학 시절 민주화 운동에 헌신했던 이들이 기성 정치인들과 다른 청렴함과 패기로 정치를 변화시켜 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컸다. 그 후 10년, 이들의 정치 성적표는 어느 정도일까.

새정치민주연합 혁신위원회에 청년대표로 참여하고 있는 이동학(33) 위원은 당내 86그룹을 상대로 연일 쓴소리를 하고 있다. 지난 15일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이 위원은 “국민은 과거 민주주의를 곧추세운 386 청년들의 국회 등원을 반겼다”면서 “그러나 불과 10여 년이 지나는 동안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는 586으로 전락한 선배들에게 많은 국민이 느꼈을 허탈감을 저희 세대도 느끼고 있다”고 했다. 또 이들이 노동개혁을 앞장서 반대하고 있는 데 대해 “국민의 눈에는 우리가 대안도 없이 개혁을 가로막는 반대 정당, 만년 야당의 모습으로 보일 수 있다”고 꼬집었다.

86그룹과 동년배인 임미애 혁신위원의 쓴소리는 더 뼈아프다. 1987년 이화여대 총학생회장을 지내고 졸업 후 남편과 함께 경북 의성으로 내려가 농사를 지으며 야당의 불모지인 경북에서 드물게 군의원에 당선되기도 했던 임 위원은 동료들을 향해 “지나간 잔칫상 앞에 서성거리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혁신위에 참여하면서 지켜본 86그룹은 자신의 문제에만 관심이 있고 정권교체를 갈망하는 국민의 요구에는 관심이 없다. ‘내가 살아야 사는 거다’ 딱 이 정도였다”고 일갈했다. 친노(친노무현)-비노(비노무현) 할 것 없이 계파의 제일 전면에 서 있는 인물들이 대부분 86그룹들이고 정청래·김현 의원처럼 ‘막말’ 논란의 중심에 선 것도 그들이다.

혁신의 주체가 이제는 혁신의 대상이 되어버린 책임은 전적으로 그들에게 있다. 민주화 운동 계급장 하나만 있으면 모든 것이 통했던 시절 그들은 너무 일찍 권력의 달콤한 맛을 봐 버렸다. DJ(김대중), 노무현에서부터 문재인, 김근태, 정세균 등 계파 보스들의 밑에서 당직을 맡고 이들의 ‘하청(下請) 정치’에 앞장서면서 자신들만의 정체성을 잃어버렸다.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데 실력을 쌓기보다 민주와 반민주, 정의와 불의라는 이분법적 시각으로 세상을 재단해 버렸다. 후배세대의 일자리를 늘리고 그들이 기댈 곳을 만들기보다 대기업 노조의 기득권 보호에 앞장섰다. 종북(從北)의 굴레를 떨쳐 버리지 못했다. ‘천안함 의혹’을 부풀릴 것이 아니라 영화 ‘연평해전’이 왜 젊은 층에 인기를 끌었는지 되돌아봐야 한다.

종이접기 아저씨는 될 수 없지만 젊은 세대들의 사다리를 걷어차는 기성세대는 되지 않아야 한다. 역사가 86세대를 ‘구태(舊態)’라고 할지 아니면 후배세대의 미래를 활짝 열어준 징검다리 세대라고 평가할지 지금 기로에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