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18년간의 무명생활을 ‘정면돌파’로 뚫고, 충무로 스타 반열에 오른 배우 김윤석은 자신의 이름 앞에 ‘영화 연출자’라는 새로운 수식어를 붙이기 위해 다양한 준비를 하고 있다. 정하종 기자 maloo@

배우 김윤석

배우 김윤석을 보면 다양한 감정이 느껴진다. 옆집 아저씨 같은 따뜻하고 구수한 이미지를 풍기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날카로운 성격이 배어난다. 영화 속에서도 그렇고, 실제 만나봐도 같은 느낌이 든다. 그것이 김윤석의 힘이다. 인간적인 매력을 품은 캐릭터는 있는 모습 그대로 자연스럽게 풀어내고, 잔혹한 악역도 자신만의 정서를 담아 입체적으로 표현해낸다.

이런 힘은 일찌감치 쌓인 무대 경험에서 비롯됐다. 그는 대학에서 독어독문학을 전공했지만 학교 극단에서 연출을 했고, 대학생이던 1988년 기성 극단에 들어가 연극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 출연하며 연기자로 데뷔했다.

지난 6월 26일 문화일보와 만난 김윤석은 “내가 독한 구석이 있다”고 강조하며 학창시절 연극 무대의 기억을 풀어냈다.

“제가 뭔가에 빠져들면 끈기가 샘솟는 스타일이에요. 연극을 시작하고 제대로 해보고 싶어서 서점을 돌며 연극과 관련된 책들을 섭렵했어요. 문학이 연극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생각에 영미 희곡, 전후 문학까지 모조리 읽었어요. 그러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등장한 ‘부조리극’에 빠져들었고, ‘불행한 환경에서 뭔가가 나오는구나’하는 것을 깨달았죠.”

전국대학생연극제에 자신의 연출작을 올려 대상을 수상하며 부상으로 한 달간 유럽 연수를 다녀온 것이 그의 인생에 자신감을 심어줬다.

“그때까지 제가 다니던 동의대는 단 한 번도 전국대학생연극제 지역 예선도 통과하지 못했는데 제가 연출자로 있던 해에 대상을 탔어요. 부상으로 한 달 동안 러시아 모스크바, 폴란드 바르샤바, 독일 베를린, 프랑스 파리 등을 돌며 처음으로 세상 구경을 했어요. 그때 자신이 하고 싶은 일들을 하며 자신만만하게 살아가는 전 세계 젊은이들을 만났고, 저도 큰 자신감을 얻었어요. ‘다들 저렇게 살고 있는데 뭔 걱정을 하나’ 그런 생각이 들었죠.”

그는 이런 자신감을 안고 미래를 향해 주사위를 던졌다.

“주변 친구들은 다들 취직 준비에 여념이 없었어요. 하지만 저는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어요. 물론 제가 지닌 재능에 대한 의심이 들었고, 초조하기도 했죠. 그래도 그걸 밖에서 판단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안으로 깊이 들어가서 몸을 완전히 던져 봐야 느낄 수 있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서울행을 결심했어요.”

1990년 서울로 올라온 김윤석은 바로 극단에 들어가 연기를 했고, 그때 송강호와 처음 만났다.

“저를 극단 연우무대 출신으로 아는 사람이 많은데 아니에요. 연우무대에서 하는 ‘현대연극 재발견 시리즈2’ 오디션에 붙어서 그렇게 알려진 거죠. 송강호와는 ‘국물이 있사옵니다’, ‘지젤’, ‘살찐 소파에 관한 일기’ 등 5편의 연극에 함께 출연하며 친해졌어요. 그 친구가 영화판에서 주목받으며 빠르게 자리 잡는 걸 보고 부러웠어요. 저보다 앞서간 친구를 보며 영향을 받았죠. 앞으로도 각자의 길을 가며 계속 서로에게 영향을 주겠죠.”

그렇게 연극 무대에 오르던 그는 연극에 대한 회의를 느끼고, 1995년 고향인 부산으로 다시 내려갔다.

“작품은 끊임없이 했지만 문득 연극의 불확실성과 제 삶에 대한 회의가 들었어요. 영화는 필름이 남지만 연극은 1회성이잖아요. 엊그제 공연이 정말 좋았어도 며칠 지나면 잊히잖아요. 또 자취를 하며 생활의 균형이 무너졌고, 가족들도 걱정을 많이 했어요. ‘내가 하고 싶은 거 하면서 많은 것을 놓치고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고, 바로 짐을 싸서 부산으로 내려갔어요.”

부산에서도 그는 연극과 관련된 일들을 하게 됐고, 1999년 다시 서울로 와서 본격적인 배우의 길을 걸었다. 부산으로 찾아온 송강호가 “다시 하자”고 권유한 것도 영향을 미쳤다.

“부산에서 카페를 차린 걸로 알려졌는데 아는 분이 하는 라이브카페에서 무대 꾸미고, 이벤트 기획하는 일을 도운 거예요. 제가 그때 무슨 돈이 있었겠어요. 1년 정도 그렇게 지내고 있는데 송강호가 찾아왔어요. 술을 한잔 마시다 ‘나 심심하다. 올라가서 하자’고 말하더군요. 그러다 극단 학전에서 하는 ‘부산 지하철 1호선’ 공연을 돕게 됐고, 서울로 와서는 자연스럽게 학전에 들어가 2003년까지 활동했어요. 김민기 선생님께 많이 배웠죠.”

김윤석이 스크린에 첫발을 내디딘 건 1994년이지만 몇몇 작품에 단역으로 출연하다 2004년 최동훈 감독의 ‘범죄의 재구성’에 형사로 나오면서부터 관객들에게 얼굴을 알리기 시작했다.

“연극은 순수하고, 영화는 그렇지 않다는 생각을 하는 그런 과는 아니었어요. 기회가 없었던 거죠. 대극장에서 연극을 하다 영화에 처음 출연하니 발성 등 많은 부분이 적응이 안 됐어요. 대극장에서는 객석까지 정확히 꽂히도록 발성을 해야 하는데 영화는 일상 발성을 해야 되거든요. ”

2005년부터 방송 드라마에도 출연한 그에게 ‘2006년’은 잊을 수 없는 해다. 데뷔 후 18년 동안 긴 터널을 걷던 그의 앞에 환한 햇살이 쏟아지기 시작한 때가 바로 2006년이기 때문이다. 그해에 유호정과 부부 호흡을 맞춘 KBS 2TV 드라마 ‘인생이여 고마워요’의 주연을 맡았고, MBC 드라마 ‘있을 때 잘해’로 연기대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또 영화 ‘타짜’와 ‘천하장사 마돈나’에 출연한 것도 그해다.

“당시에는 너무 정신이 없어서 생각하지 못했지만 2006년이 제게는 정말 중요한 해였어요. 드라마 2편하고, 영화도 2편 찍으며 과로로 살이 쏙 빠졌어요. 거기다 ‘가을날의 꿈’이라는 연극도 한 편 했고요. 4마리의 토끼를 잡았는데 한 마리를 놓쳤어요. 연극은 만족도가 50% 정도밖에 안 됐거든요. 그때 결심했어요. 연극은 다른 일정 다 빼고 온전히 몰입할 수 있을 때만 하기로요.”

그 후 그는 2008년 영화 ‘추격자’에 출연하며 충무로 스타 반열에 올랐고, 이후로도 승승장구하며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본격적인 첫 주연작은 ‘추격자’지만 ‘타짜’ 이후로 주연급 시나리오가 들어왔어요. 유명하고 힘 있는 감독들의 작품도 많았는데 이상하게 신인 감독인 나홍진의 ‘추격자’가 끌리더라고요. ‘생 날것에서 뭔가 물건이 나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죠. ‘타짜’의 성공과 ‘추격자’의 성공은 의미가 크게 달라요. ‘타짜’는 다른 배우들과 결합해서 거둔 성공이지만 ‘추격자’는 제가 가시밭길을 선택해서 끝까지 물고 늘어져 얻어낸 성공이거든요. 확신이 들었어요. ”

그는 자신을 정상에 오르게 한 동력으로 ‘정면돌파’와 ‘형식으로부터의 자유’를 꼽았다.

“계속 정면돌파하면서 여기까지 왔어요. 지금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저를 다잡아요. 절대 안주하지 말고, 돌아가지도 말라고요. 또 연기철학이라고 하기는 뭐하지만 저는 저 자신을 절대 형식의 틀 안에 가두지 않아요. 구르다가 부딪히고 깨져서 모양이 변하는 돌처럼 계속 변화하며 가는 거죠. 마지막 여정을 마칠 때 어떤 모양이 될지 궁금해요. 그때까지 그대로 놔둘 거예요. 모난 돌이 동그랗게 되고, 또 귀퉁이가 떨어지더라도요.”

‘극비수사’를 통해 흥행 파워를 다시 한 번 입증한 김윤석은 이제 새로운 도전을 준비하고 있다. 영화 연출이 그의 다음 행보다.

“제가 다시 연출자로 나선다면 엄청나게 혹독한 준비를 할 거예요. 나이가 있는지라 도전의 시기가 그리 멀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계속 할만한 이야기를 찾고 있어요. 우리나라에서는 유독 감독이 감투인 것으로 생각해서 배우가 감독으로 나서면 ‘어디 감히’라는 생각을 하죠. 그런 분위기를 깨고 싶어요. 상처투성이가 되더라도 ‘연출자 김윤석’을 볼 날이 있을 겁니다. 그렇게 되면 송강호와 연출자와 배우로 만날 수도 있겠죠(웃음).”

김구철 기자 kckim@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