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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장점을 하는 할머니와 작은 나무배를 만드는 아버지의 작업실을 오가며 자라던 한 아이는 날마다 이것저것 잘라보고 매만지고 깎으면서 자랐다. 또 할머니네 집에 가면 서가에 꽂힌 각종 백과사전과 도감을 꺼내어 읽고 또 읽었다. 아이가 자주 손에 잡았던 책은 백 년 전쯤에 출간된 낡은 복식도감과 1960년대 세계 각국의 다양한 도시 사람들의 삶을 소개하는 그림책이었다. 이렇게라도 가보지 못한 곳, 만나지 못한 사람들의 모습을 짐작해 보면서 놀았다.

이 아이는 후일 세상의 구석구석을 직접 관찰한 다음 판화로 새겨 그림책에 담는 작가가 되었다. 리놀륨 판화로 독특한 이미지 세계를 구축해 온 프랑스의 그림책 작가 조엘 졸리베의 얘기다. 리놀륨 판화는 한 번 조각도로 도려내고 나면 다시 바꿀 수 없는 표현 방식의 물리적 한계 때문에 정교한 선을 나타내기 어렵다. 하지만 꿈틀거리는 화가의 손동작과 힘을 더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본능적이고 생생한 느낌을 준다. 졸리베 판화의 매력이 아름답게 망라된 그림책이 바로 ‘세상의 낮과 밤’(파니 마르소 글·조엘 졸리베 그림, 이정주 옮김 / 보림·일러스트)이다.

이 책은 딱딱하고 두꺼운 종이를 활용해 병풍처럼 펼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둥글게 돌려세워 놓으면 그림책 속 세상 안에 어린이가 앉아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다. 표지와 글이 적힌 띠 부분을 제외하면 전체가 흑백으로만 이루어져 있는데 낮일 때는 흰색 바탕에 검은 선이, 밤을 보여줄 때는 검은 바탕에 흰 선이 그림책의 형태와 의미를 주도한다. 중국 윈난(雲南)성, 인도네시아의 순다르반스 군도, 모리타니의 사하라 사막, 아이슬란드의 해협과 루마니아의 산맥까지 작가의 조각도는 거침없이 나아간다. 선과 면의 대담한 흐름을 따라 떠나는 지구 대탐험인 셈이다. 놀라운 것은 생생한 공간감과 구체성이다. 작가는 조금씩 시점을 달리하면서 최대한 근접하여 장면을 잡아냄으로써 그림 속 한 모퉁이에 책을 읽는 내가 앉아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안겨준다.

어린이가 세계를 알고 싶어 할 때 백과사전을 마련해주는 시대는 지났다. 지금 필요한 것은 그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을 경험하게 해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그림책은 강렬하고 예술적인 하나의 시선이다. 장소의 감각을 느낄 수 있는 간결한 문장도 인상적이다. 접하기 힘든 예술적 그림책을 공들여 소개하고 있는 보림의 ‘더 콜렉션’ 시리즈의 신작이다.

김지은<어린이·청소년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