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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회평 / 논설위원

공부할 영어 단어와 수학 문항 수를 줄여 사교육을 잡겠다는 교육부 발표는 귀를 의심할 만했다. 모든 나라가 미래 인재들의 학력 높일 방안을 고민하는 터에 공부 덜하라고 독려하는 정책을 만든 관료의 머릿속이 궁금하다. 그러나 교육부만 질책하기엔 억울한 측면이 있다. 이런 발상법이 경제 분야에선 생소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느 집단의 성적이나 실적이 부진하면 내부에서 원인을 찾는 게 상식이다. 부족한 기초 실력을 키워주고,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할 여건을 만들어주면 된다. 그런 점에서 한국의 중소기업 정책은 특이하다. 원인을 외부에서 찾는다. 대기업은 그 주범이다. 대기업의 횡포에 중소기업이 못 큰다고 믿는 ‘선악 논리’다. 그러다 보니 중소기업 정책은 울타리를 치는 쪽으로만 흘러간다. 중소기업 적합업종도 그렇게 나왔다.

동반성장위원회 주도로 2011년 시작한 적합업종은 올해 ‘3년 일몰’ 시한을 맞았다. 그동안 지정된 100개 품목 가운데 82개가 대상이다. 일몰 규정이니 없어지는 게 원칙이지만, 적합업종은 어느새 건드리기 힘든 기득권이 돼버렸다. 신규 목록에 오른 업종도 여럿이다. 그러나 3년 성적표는 적합업종의 명분도, 실리도 챙기지 못했다.

막걸리는 적합업종 선정 후 동반 몰락의 길로 갔다. CJ·롯데주류 등 대기업이 빠지면서 서울탁주·국순당이 시장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등 독과점이 심화됐고, 전국 800여 양조장이 나머지를 놓고 출혈경쟁을 벌이고 있다. 대기업의 자금·유통망이 사라진 후 출하량도, 수출도 함께 줄었다. 그러자 대기업을 규탄하던 중소업체 상당수가 입장을 바꿨고, 결국 ‘자율협약’이란 단서를 붙여 대기업 재참여로 결론 났다.

발광다이오드(LED)는 진작 국내 기업 역차별이란 지적이 있었지만, 3년 사이 중국산이라는 새 적수까지 추가됐다. LED 조명시장을 골목상권쯤으로 본 한국과 달리 중국은 차세대 유망산업으로 삼아 대형화를 지원해왔다. 지금 국내 민간시장은 필립스·오스람 등 글로벌 제품과 국산 외피만 쓴 중국산이 장악했다. 경쟁을 없애면 산업이 죽고, 거기에 속한 중소기업도 말라간다. 두부의 경우 고급품을 주로 만들던 대기업의 발을 묶자 국산콩의 수요가 뚝 떨어지면서 애꿎은 콩 재배 농가가 피해를 봤다. 중소 두부 업체와 농가의 힘겨루기는 ‘국산콩 두부에 한해 대기업 참여’ 선에서 봉합됐다.

시장에는 국경이 없다. 국내에서 아무리 칸막이를 쳐도 외국 대기업을 막지 못한다. 그뿐 아니다. 고추장·된장·간장 등 장류는 적합업종이지만, 대형 마트는 자체 브랜드인 PB상품으로 버젓이 이들 제품을 판다. 유통 대기업도 직접 생산하지 않으면 적합업종 규제를 피해갈 수 있다. 시장에서 대기업을 내쫓으면 연계된 협력 중소기업과 근로자, 납품 농민도 피해를 본다. 보호받는 중소기업과 이들 중 누가 약자인가.

한국경제연구원 보고서는 3년 시한을 맞은 82개 적합업종 품목 중 50개에서 생산액이 감소했고, 43개에선 사업체 수가 증가했다고 분석했다. 강자가 사라진 곳에 너도나도 뛰어들어 각자의 몫을 오히려 줄이는, 시장의 레드오션화가 진행된 것이다.

적합업종은 전형적인 경쟁제한 규제다. 경쟁을 배제한 채 경쟁력을 높일 방법은 없다. 자동차를 처음 개발한 영국은 기존 산업 보호 명분으로 마차보다 빠르게 가지 못하게 하는 규제를 만들었다가 독일에 주도권을 내줬다. ‘민간기구’ 동반성장위가 주도하는 적합업종은 등록되지도 않은 그림자 규제다. 적합업종 3년을 맞아 논란이 많았던 일부 품목은 조정되는 운명을 맞았지만, 그나마도 ‘자율협약’ ‘시장감시’ ‘한시보류’ 등으로 숨을 붙여놓았다. 규제란 이렇게 한 번 생기면 좀비처럼 끈질기게 살아남는다.

저성장 국면에 디플레이션 우려까지 겹친 한국경제에 가장 시급한 것은 시장의 활력이고, 그 원천이 경쟁과 벤처 정신이다. 특정 사업의 ‘적합’ 여부는 책상에서가 아니라 시장에서 결정되는 것이다. 정책의 오류가 드러났는데도 책임지는 사람은 없다. 경쟁을 막는 구시대 칸막이들을 방치한 채 눈앞에 닥친 신산업 시대를 헤쳐나갈 수 있는가. 지식경제부 장관 시절 적합업종 도입을 지휘했던 최경환 경제부총리, 규제개혁위원장을 지낸 안충영 동반성장위원장이 답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