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지난 11월 29일 서울 구로구 남구로역 인근 골목길에서 사회적기업 월메이드 직원과 대학생 자원봉사자, 지역 주민들이 페인트로 벽화를 그리고 있다.

“여성이 길에서 치한을 만나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데서 오는 스트레스, 안전 확보를 위해 투입되는 경찰력 등은 모두 사회적 비용입니다. 아름다운 벽화가 그려진 골목길만으로도 지켜보는 눈이 늘어났다는 인상을 줘서 이런 사회적비용을 상당 부분 아낄 수 있습니다.”

지난 11월 29일 서울 구로구 남구로역 인근 골목길에서 사회적기업 ‘월메이드(wall-made)’ 직원과 대학생 자원봉사자, 중국동포, 지역주민 10여 명이 칙칙한 회색 벽 위에 대나무와 소나무, 판다 등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월메이드는 벽화와 공공예술을 통해 ‘살고 싶고, 걷고 싶은 마을’을 조성하자는 사회적 목적을 추구한다. 허창주 월메이드 대표는 “당장 범죄율이 떨어진다는 수치적인 효과를 논할 수는 없지만 일단 환경이 환하게 변하면 행인이나 지역 주민이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느끼게 된다”며 “우리 사회에 안전이 화두가 되면서 국토교통부, 서울시, 경찰청 등 공공기관도 벽화 그리기에 점진적으로 관심을 두고 있다”고 말했다.

월메이드가 지난 9월부터 벽화 작업을 진행하고 있는 남구로역 일대는 매일 새벽 인력시장이 형성된다. 경찰 추산 3000여 명의 건설노동자가 일자리를 얻기 위해 이곳으로 모인다. 그날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사람들이 새벽부터 길거리에서 술판을 벌이거나 골목에 노상방뇨를 하는 등의 기초질서 훼손이나 주취폭력이 많이 발생했다. 이 일대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물론이고, 매일 아침 남구로역을 이용하는 사람들 역시 “동네가 너무 지저분하고 지나다닐 때 괜히 불안한 마음이 든다”고 하소연하기도 한다.

이렇게 어두침침한 분위기를 풍겼던 남구로역 골목길이 지난 9월부터 밝고 환한 느낌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 월메이드는 구로경찰서의 지원으로 남구로역 5번 출구 인근의 4개 골목에서 ‘찾고 싶은 골목 만들기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월메이드는 작업 3개월 전부터 주민 설문조사를 통해 대상 골목길을 정했다. 중국동포 거주 비율이 높은 지역 특성을 반영해 대나무, 판다 등 중국인들에게 친숙한 이미지를 벽화 소재로 선택했다. 미술을 전공한 월메이드 직원이 밑그림을 그리면 지역주민, 중국동포, 자원봉사자들이 페인트로 색칠하는 방식으로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미술에 소질이 없는 사람들도 벽화 그리기 작업에 참여할 수 있다. 허 대표는 “주민들이 직접 벽화 그리기 작업에 참여하면서 내가 사는 동네와 이웃에 대한 애정을 더 갖게 되는 것도 프로젝트의 목적 중 하나”라고 말했다.

무미건조한 회색 벽이 하얀 바탕에 대나무, 소나무, 판다 등이 어우러진 한 폭의 그림으로 바뀌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주민들은 만족감을 나타내고 있다. 40년째 남구로역 인근 골목에 거주 중인 한 할머니는 자원봉사자들에게 음료와 빵 등 간식거리를 나눠주며 “집 앞에서 맨날 술판을 벌이고 노상방뇨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자원봉사자들이 벽화를 그리기 시작하면서 그런 일이 많이 줄었다”고 했다. 그는 “벽화가 삭막하고 각박한 우리 마음을 달래주기까지 한다”며 “좋은 일을 해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주민 김태신(75) 씨는 “지저분한 곳에서는 함부로 행동하고 깨끗한 곳에서는 그렇게 못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라며 “골목이 화사해지면서 지역주민이 안심하고 거리를 다닐 수 있어 편해진 거 같다”고 말했다. 이날 벽화 그리기 작업에 참여한 월메이드 직원 이유진 씨는 “같은 여성으로서 이 골목길을 지나다니는 여성들이 조금 더 편한 마음으로 걸을 수 있는 거리를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월메이드는 기업과 지방자치단체 등으로부터 벽화 그리기 사업을 따내 서울 곳곳의 어두운 골목길을 벽화로 밝혀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단순히 환경 미화 차원을 넘어서서 많은 사람이 주목하는 거리를 만들어 범죄를 억제하는 등 사회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지난 2012년 한국사회적기업진흥원의 청년 사회적기업가 육성사업에 선정됐고, 현재는 서울시 예비 사회적기업으로 등록돼 있다. 벽화 그리기 작업을 통해 더 안전한 환경을 조성하고 지역 주민들의 마을에 대한 공동체 의식을 고양하는 한편, 예술가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역할도 수행하고 있다. 수익의 3분의 2를 젊고 실력 있는 예술가들이 작품 활동을 지속할 수 있도록 작업실 임차료로 지원하고 있다.

벽화 그리기가 주민들의 호응을 얻으면서 프로젝트는 더욱 다양한 형태로 발전하고 있다. 월메이드는 올해 8월 15일 광복절을 맞아 서울 강남구 신사동 가로수 길에서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가 남긴 예술작품을 골목길 벽화로 재탄생시켰다. 내국인과 외국인 등 유동인구가 많은 지역에 위안부 할머니를 떠올리는 작품을 남겨 위안부 이슈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유도하기 위한 프로젝트였다. 월메이드는 또 여러 대기업의 사회공헌 활동을 도와 사회복지시설과 학교, 소외지역 등에 벽화를 그리고 있다. 지자체의 마을 가꾸기 사업에도 활발히 참여하고 있다.

글·사진=김영주 기자 everywhere@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