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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많은 바람둥이 역할은 남자 배우의 ‘로망’이죠. 현실에선 불가능하니까요. 진지한 역을 많이 했었는데, 이번엔 걸쭉한 욕도 거침없이 내뱉고, 평소 할 수 없던 행동을 마음껏 해요. 잠재돼 있던 걸까요. 연기하는 게 정말 즐거워요, 하하.”

지난 7일부터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 중인 연극 ‘우리는 영원한 챔피언(연출 채승훈)’에 출연 중인 김태훈(영상예술학·사진) 세종대 교수의 말이다. 연극은 국립극단의 ‘세계명작 클로즈업’ 시리즈 첫 번째로, 미국 극작가 제이슨 밀러의 ‘댓 챔피언십 시즌(That Championship Season)’이 원작이다. 1972년부터 1974년까지 브로드웨이에서 700회 공연을 하고, 1982년엔 영화와 TV 드라마로도 제작됐지만 국내엔 잘 알려지지 않았다. 1970년대 초반 미국 중년 남성들의 이야기가 스포츠와 정치를 테마로 해 역동감 있게 펼쳐지는데, 물질 만능주의와 성공 지상주의 등을 적나라하게 파헤쳐, 시공간을 초월해 공감대를 이끌어낸다.

남자 다섯 명만 출연하는 이 ‘수컷’ 연극에서 김 교수는 이탈리아 이민 2세 필 로마노 역을 맡았다. “고교 동창생 조지 시코우스키(김동완 분)의 시장 선거 자금을 댈 수 있는 재력가이자, 조지의 아내와 불륜을 저지르는 문제적 인물이에요. 차도 요트도 2∼3대(척)씩 거느리지만 정작 내면은 황폐해져 삶의 재미를 모르죠.”

꽃같이 젊은 미중년이 아니라 산전수전 다 겪은 중년 남성들의 ‘진짜’ 삶을 담은 연극은 올해 극립극단의 기획 주제인 ‘자기 응시’를 본격적으로 다뤘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승리와 성공에 매달려 결국 가장 중요한 자기 정체성을 상실한 중년 남성들은 고교 동창회에서 만나 울고, 웃고, 싸우고, 화해한다. 미국의 한 소도시가 배경이지만, 지금 한국 사회에 적용해도 어색함이 없다. 고교 농구팀에서 만나 우정을 나눴던 네 명의 남성들은 당시 우승을 함께 일궜던 감독(박용수 분)과 해후, 지난 시절을 추억하지만 사실은 ‘정치’를 한다. 동창회는 각자 현실의 ‘필요’를 나누는 비즈니스의 장으로 바뀐다.

김 교수는 “과거 영광에 매몰된 감독, 알코올의존자 톰 데일리(박완규 분), ‘잘나가는’ 친구의 비위를 맞추는 성실한 가장 제임스 데일리(이종무 분), 아내와 불륜을 저지른 친구에게 돈을 구걸하는 정치인 등 다섯 캐릭터가 매우 뚜렷하게 구별된다”고 설명했다.

동창생들의 갈등을 풀어나가는 중심인물은 농구팀 감독. 그러나 “지는 것은 죄악이다”라며 그들에게 냉혹한 성공윤리를 주입 시킨 장본인도 감독이었음이 드러나며 극은 절정에 이른다. ‘고곤의 선물’에서 박상원과 더블캐스팅돼 호평을 받았던 김 교수를 비롯해 드라마와 영화, 연극무대를 넘나들며 깊은 연기를 선보이는 박용수, 연극무대에서 활발히 활동 중인 김동완, 이종무, 박완규 배우의 탁월한 연기가 세련된 연출을 만나 더욱 빛을 발한다. 공연은 오는 23일까지. 1688-5966

박동미 기자 pdm@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