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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억∼16억 달러(약 1조2800억∼1조7000억 원) 규모로 추산되는 이라크 정부 소유의 도난 자금이 레바논 시골지역의 한 벙커에서 발견됐다는 사실이 최근에서야 드러났다. 2003년 미국의 침공으로 사담 후세인 정권이 무너진 후 이라크의 재건사업을 위해 투입됐던 수백억 달러 규모의 지원 자금 중 일부다. 전쟁으로 이라크가 극도의 혼란에 빠진 틈을 타 사라졌던 돈의 행방이 10여 년이 지난 후에야 확인된 셈이다.

미국이 이라크 전쟁을 일으킨 직후인 2004년 이라크 재건사업 특별감사관으로 현지에 파견된 스튜어트 보웬은 지난해 활동을 마무리한 후 이 같은 사실을 지난 12일 뉴욕타임스(NYT)에 처음 털어놨다. 보웬과 인터뷰한 NYT 기자 제임스 리센은 14일 이러한 내용이 포함된 보웬의 활동기록을 ‘대가를 치러라: 탐욕, 권력 그리고 끝없는 전쟁(Pay Any Price: Greed, Power and Endless War)’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펴내기도 했다.

레바논 벙커에서 발견된 십수억 달러는 이라크 전쟁이 공식적으로 종결됐음에도 그동안 이라크 재건을 위해 국제사회가 투입한 천문학적인 돈 중 상당수는 효과를 보지 못한 채 공중에 흩어져 버렸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게다가 최근 수니파 극단주의 무장조직 이슬람국가(IS)의 준동으로 이라크 내 안보상황이 급변하면서 세계 각국이 또다시 새로운 이라크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있어 비슷한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후세인 정권이 붕괴된 후 이라크 재건을 명목으로 이라크 개발기금(DFI)을 조성했다. 이 기금은 미국 주도의 이라크 연합군임시기구(CPA)의 요청에 따라 이라크 석유판매 대금과 후세인 정부의 미국 내 계좌 압류 자금, 유엔 예산 잉여금 등으로 조성된 것이다. 미국 뉴욕 연방준비은행이 운영하는 뉴저지 시설에 보관돼 있던 DFI는 C-17 수송기에 실려 수차례 바그다드로 이송됐다. NYT에 따르면 1년 반 동안 이렇게 이라크로 전달된 돈만 120억∼140억 달러에 달했고, 추가로 50억 달러가량이 전산시스템을 통해 계좌이체됐다.

당시 미국의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이 자금이 새로 들어서는 이라크 정부의 재정적 안정에 도움이 되고 이라크 국민들을 위한 기반시설 건설에 사용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일부는 바그다드에 도착한 후 행방이 묘연해졌다. 당시 이라크 정치권에는 부정부패가 만연했고 이를 관리감독할 기구도 부재한 상황이어서 상당한 규모의 돈이 용처가 드러나지 않은 채 사라졌다.

이라크 정치인들이 이를 착복했다는 소문은 물론 각 부처가 유령 인부에게 월급을 지급하는 방식으로 돈을 빼돌렸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일부는 이라크 재건 사업에 참여한 미국 민간기업에게 무분별하게 흘러들어갔으며, 미국 언론들은 몇몇 기업들이 미국 정치권과 유착돼 있을 수 있다는 보도를 쏟아내기도 했다.

2003년 당시 영국의 저명한 구호단체인 ‘크리스천 에이드(Christian Aid)’ 역시 CPA가 이라크 재건을 위해 할당된 수십억 달러의 사용처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난하는 등 CPA의 불투명한 자금 집행은 여러 차례 도마에 올랐다. 2010년 7월 미국의 이라크 재건 특별감찰실(SIGIR)은 DFI에 할당된 230억 달러 중 87억 달러의 용처가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NYT에 따르면 CPA가 DFI를 사용한다는 것은 자금 사용을 둘러싼 법률적 제한이나 의회의 감시로부터 비교적 자유롭다는 것을 뜻했다. 이는 미국 국민들의 세금으로 조성된 돈이 아닌 이라크 정부의 돈이었기 때문이다.

2004년 이라크에 파견된 보웬과 팀원들은 DFI의 유용과 관련된 문제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수년에 걸친 조사 끝에 2010년, 레바논 출신의 미국인 팀원 와엘 엘 제인이 이라크 정부가 도난당한 자금 관련 정보를 입수하는 데 성공했다. 보웬과 그 팀은 2010년부터 ‘브릭 트래커(Brick Tracker)’라는 이름의 작전에 착수, 결국 레바논의 한 벙커에 이라크 정부 소유의 현금과 금괴가 보관돼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러나 “자신들의 통제권한을 넘어선 이유들” 때문에 보웬과 그 팀원들은 그동안 이 사실을 숨겨오다가 최근에서야 책 발간과 함께 미국 언론에 털어놓게 된 것이다. 보웬은 자신도 이 돈이 어떻게 레바논까지 흘러들어갔는지 알지 못한다며 “이라크에서 지난 10년간 수십억 달러의 돈이 불법적으로 해외에 반출돼 왔다”고 단언했다.

보웬이 레바논 벙커에 은닉돼 있던 이라크 재건 자금을 찾아내긴 했지만 이후로도 도난 자금을 회수하기 위한 작업은 진행되지 않았다. 보웬은 그 책임을 미국 및 이라크 정부의 비협조적 태도에서 찾았다. 보웬은 2010년 관련 정보를 입수한 후 이 사실을 미국 정보기관에 알렸지만 조사과정에서 별다른 도움을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당시 미 중앙정보국(CIA)은 이 문제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연방수사국(FBI)은 이라크 내부의 일이어서 자신들의 관할권이 미치지 않는다는 입장이었다고 보웬은 회상했다. 한마디로 “이라크인들이 이라크의 돈을 훔친 일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레바논 주재 미국 대사관은 이들 조사팀원들의 레바논 방문을 안전상의 이유로 불허하기까지 했다. 조사팀은 당시 레바논의 검찰총장이었던 사이드 미르자까지 만나 협조를 부탁했으며 미르자 역시 처음에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으나 후에 가서는 입장을 바꿨다.

이라크 정부 역시 도난 자금을 회수하는 데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으며 오히려 레바논 벙커와 관련된 정보들을 비밀에 부쳤다. 보웬은 자신이 지금은 실각한 누리 알말리키 이라크 전 총리와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으나 총리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미국이 해당 자금을 관리해온 방식에 대해 불만만 늘어놓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보웬은 “이 사건을 추적하면서 관계부처들로부터 시의적절한 지원을 받기 위해 고군분투했다”면서 실망감을 드러냈다.

인지현 기자 loveofall@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