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진수 / 논설위원

이 가을 그림 속 옛 인물들을 마주하고 역사를 돌아볼 수 있다. 지난 9월에 첨단 건축물인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열린 ‘간송 문화전’에서 ‘한국의 모나리자’라는 혜원 신윤복의 미인을 만났다. 수줍은 양 눈길을 내린 모습이 더욱 매혹적인 ‘미인도’. 76년 만의 외부 나들이에 그녀 얼굴에도 설렘의 미소가 감도는 듯했다.

예향(藝鄕) 광주에서는 공재 윤두서(1668∼1715)라는 강직한 선비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그의 자화상은 흔히 서양의 ‘렘브란트 자화상’에 비견된다. 오는 21일부터 내년 1월 18일까지 광주광역시 하서로의 국립광주박물관에서 ‘공재 윤두서 서거 300년 특별전’과 학술심포지엄(11월 26일)이 열린다. 이번 전시에는 국보 240호 윤두서 자화상과 보물 481호인 ‘윤씨가보’ 등 약 120점이 나온다. 윤두서는 고산 윤선도의 증손이자 다산 정약용의 외증조다. 윤두서는 조선 풍속화의 선두에 선 화가였고, 인물화 거장이었다. 그는 1710년 8월에 죽은 친구 심득경을 그리워하며 석 달 뒤 11월에 초상을 그렸다. 그림을 심득경 집에 걸자 가족들은 고인이 돌아왔다며 통곡했다.

무엇보다 우리의 관심을 끄는 작품은 윤두서 자화상이다. 조선시대 초상화 중 최고 걸작이며, 초상화로는 드물게 국보로 지정됐다. 정면을 바라보는 눈동자가 형형하고 강렬해 한번 보면 도저히 잊기 어렵다. 쥐 수염을 묶어서 만든 서수필(鼠鬚筆)로 한올 한올 묘사한 턱 밑 긴 수염과 얼굴 옆의 구레나룻 수염은 갈기를 세운 듯 꼿꼿하게 굽이친다. 이 자화상을 본 그의 친구들이 “온화한 자네 모습과 닮지 않았고, 무인(武人)처럼 보여. 후세 사람들이 오해할 걸세”라고 지적해도 윤두서는 싱긋 웃을 뿐이었다. 윤두서는 진사에 급제했지만 형을 비롯한 친구들과 함께 이영창 옥사 사건에 연루되는 무고를 당했다. 그는 벼슬을 포기하고 실학에 몰두했다. 30세에 이미 머리카락이 반백이 됐다. 그럼에도 자화상 속 눈빛의 당당함은 혼탁한 시대를 꿰뚫어보는 듯하다. 윤두서가 살았던 시기는 당쟁이 가장 치열했던 시대였다. 그의 주변사람들은 정쟁의 희생물이었다. 윤두서의 눈빛이 300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오늘의 한국 사회를 정면으로 응시한다. 모습은 바뀌었지만 조선시대와 같은 계파정치에 포획당한 우리 정치판을 바라보는 그의 눈길이 매섭다. 그림 속 인물이 우리를 다독이고 가르친다. 왜 너희는 역사에서 아무런 배움도 얻지 못하는가.

‘윤두서 서거 300주기’에 우리에게 던져진 또 다른 화두는 문화자원의 활용이다. ‘문화는 명사가 아니고 동사’라는 말대로, 우리는 문화의 원천 자원을 이 시대에 걸맞은 옷을 입혀 되살려내야 할 사명이 있다. 하지만 우리 문화계는 윤두서의 자화상처럼 세계 미술계에서도 주목할 만한 문화 원형을 21세기형 콘텐츠로 만드는 데 둔감하다. 윤두서 자화상이나 혜원의 미인도 등을 창작 소재로 해 이야기와 영상 이미지로 재구성한 뒤 방송 드라마뿐 아니라 영화, 애니메이션, 게임 등의 문화산업으로 발흥시켜야 한다. 독특한 우리의 문화를 세계에 발신하기 위한 새로운 문화 국부론(國富論)을 써야 한다. 빅데이터와 정보기술(IT) 산업을 최대한 활용할 필요가 있다. 한국문화의 ‘원천자원’이 깊은 잠을 자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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