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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호/경희대 교수·정치학

개혁은 총체적이어야 한다. 한 부분만 바뀌고 다른 부분은 그대로라면 개혁이 될 수 없다. 모든 부분이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정치 개혁도 총체적이어야 한다. 정치는 홀로 존재하지 않고 경제·사회·문화와 경계를 찾기 힘들 만큼 섞여 있다. 그러니 국회와 정치권만 바뀐다고 정치 개혁이 될 리 없다. 근본적으로 사회 분위기와 관행, 국민 의식이 영역마다 함께 쇄신돼야 국회와 정치권도 진정한 개혁을 이룰 수 있다.

요즘 우리는 정치 탓, 국회 탓만 하는 경향이 있다. 국회만 바뀌면 정치 개혁이 되고 나라 상황이 나아질 것이라고 믿는 것 같다. 특히, 세월호특별법 제정을 둘러싼 정국 대치와 교착은 이런 경향을 가속시켰다. 세월호 참사 직후엔 행정부가 주된 비난을 받더니 이젠 특별법 처리 문제로 비난 대상이 국회와 정치권으로 옮겨 갔다. 물론 국회와 정치권은 비판받을 만하고 개혁돼야 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론 부족하다. 사회 모든 부문이 함께 반성하고 변해야 개혁의 실제적인 효과가 나타나게 된다.

이를 뒷받침하는 사례로 1890년대∼1910년대 초의 미국 혁신주의(革新主義·progressivism) 시대를 보자. 19세기 말 미국은 부정부패와 부조리로 병들어 있었다. 경제는 독과점으로 왜곡되며 사회 불평등이 심해지고 있었다. 권력은 소수의 정치 보스들에게 집중됐고, 정·경 유착의 부패가 극심했다. 여성·흑인에 대한 차별은 여전했으며, 이민자·노동자 등 사회적 약자의 인권은 땅에 떨어져 있었다. 이 암울한 상황을 혁신하려는 노력이 지식인과 법률가·교사·의사·목사·기업인 등 각종 전문가 그룹 및 중산층을 중심으로 사회 곳곳에서 총체적으로 진행됐다. 그 결과 현대 미국의 기틀이 마련될 수 있었다.

미국 혁신주의 시대의 특징은 변화가 다면적·전면적이었다는 점이다. 부패와 비효율에 빠진 정부와 정치권을 개혁하고 경제 구조, 문화 의식, 사회생활 등 전체를 개조하자는 거시적 공감대 아래 다양한 세력이 다양한 영역에서 변화를 주도했다. 그러한 노력은 실제 여러 성과를 낳았다. 정치적으론 권력을 일반 유권자에게 돌려주기 위해 주민 발의·투표·소환제와 예비선거제를 도입하고 상원선거를 직선으로 바꾸었다. 경제 영역에선 독점 금지를 위해 기업 규제정책을 확대하고 연방정부 차원의 통화정책을 수립했다. 관세도 합리화하고 소득세에도 근본적 변혁을 가했다. 사회적으론 약자 보호를 위해 아동노동 금지, 여성 참정권 부여, 노조 보호책 등의 개혁적 방안을 추진했다.

무엇보다, 제도·정책 차원뿐 아니라 국민 의식 차원에서 변화를 추구했다는 점이 특기할 일이다. 미국 혁신주의자들은 과학적 합리성 정신과 현대적 효율성 가치를 개혁의 근본으로 중시했다. 기업과 국가도 과학적으로 경영해야 한다는 테일러주의가 의식 변혁을 이끌었고, 금주운동도 문화·의식 개혁의 한 부분을 차지했다. 물론 현재 관점에서 보면 당시의 과학주의와 금주운동은 너무 단선적·획일적이었다. 하지만 사회 발전을 위한 의식 변혁이란 취지는 높이 살 만했다. 그런 의식 변혁을 강조하는 맥락 속에서 공교육 강화, 의료 및 음식의 질 향상, 가족 가치의 확산, 빈곤퇴치, 자선사업 등이 핵심 사회 의제로 떠오를 수 있었다. 의식과 문화 차원의 변화 노력이 있었기에 미국 정부와 정치권이 여러 제도·정책 차원의 개혁을 잘 이룰 수 있었다.

미국 혁신주의 시대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 크다. 국회·정치 개혁은 사회 곳곳에서 국가 혁신과 함께 추진돼야 한다. 공동선을 위한 최소한의 의무와 공적(公的) 의식은 외면하고 자기 이익만 내세우는 국민 의식이 유지되는 한, 자기 성찰 없이 남 탓만 하는 사회 분위기가 지속되는 한 진정한 정치 개혁은 불가능하다. 미국 혁신주의 시대처럼 사회 전반에서 혁신 바람이 불 때 국회와 정치권도 바뀌지 않을 수 없다.

총체적 국가 혁신에 병행하는 정치 개혁은 특정 정당보다는 초당적 연대에 의해 이끌린다. 미국 혁신주의 시대는 공화당의 시어도어 루스벨트, 로버트 라폴레트, 그리고 민주당의 우드로 윌슨, 윌리엄 브라이언 등이 초당적으로 주도했다. 우리 경우에도 국회·정치 개혁이 전체적 국가 혁신과 함께 간다면 양당의 혁신적 의원들이 초당적으로 함께 주도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