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1950∼1960년대 미국 이발소를 콘셉트로 하는 ‘바버숍’이 강남, 홍익대, 한남동을 중심으로 속속 문을 열고 있다. 서울 압구정동 한복판에 자리 잡은 한 바버숍에서 중년의 신사가 헤어커트 서비스를 받고 있다. 김낙중 기자 sanjoong@munhwa.com

갈색 윙팁(날개 모양 구두코) 슈즈에 줄무늬 양말. 가운을 걸쳤지만 살짝 드러나는 부분만으로도 알 수 있다. 60대 초반으로 보이는 이 신사는 꽤나 스타일에 민감한 사람이다. 눈을 지그시 감고 헤어디자이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디자이너는 탈모방지법에 대해 알려주고 있었다. 거울 앞에는 붓, 솔, 면도칼, 그리고 일명 바리캉(클리퍼)이라고 불리는 이발 용품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디자이너는 약식 습식면도 후 귓속 털까지 정리해준다. 일반 미용실에서는 볼 수 없는 생경한 풍경. 타일이 촘촘하게 깔린 바닥.(가본 적도 없는) 1960년대 미국의 한 바버숍(Barber Shop·이발소)에 들어온 기분이다. 시공을 초월한 이곳은 압구정동 한복판의 ‘블레스’. 간판 한쪽에 만국공통 이발소 표시등이 쉼없이 돌아간다.

◆ 파마약 냄새·아줌마 수다·촌스러움…3無 ‘바버숍’ 인기 = 우리말로 하자면 이발소이지만 한국인들이 연상하는 ‘그 (촌스럽거나 퇴폐적인) 이발소’와 확연하게 다르니, 오리지널리티를 존중해 ‘바버숍’이라 부르는 게 좋겠다. 그래도 쉽게 풀어내자면 이발소가 진화해 부활했다. 남자들의 그루밍(미용) 공간으로 말이다. 1950∼1960년대 영국과 미국의 이발소 모습을 본떠 이국적이고 클래식하다. 오랫동안 유명 스타들의 헤어스타일리스트로 활동했던 예원상(40) 블레스 대표가 “한국의 부정적인 이발소 문화를 바꾸고 싶었다”며 2012년에 정식으로 문을 열었다. 예 대표는 이미 2004년부터 UN빌리지 내 사진 스튜디오 안에 일명 ‘예원상 이발소’라는 작업실을 꾸린 바 있는데, 주로 연예인이나 사진작가 등 패션·뷰티계 관계자들이 이용했다. 그러나 가위보다 브러시를 드는 일이 더 많아지는 게 아쉬워 그간의 노하우를 바탕으로 한국형 바버숍을 차린 것. ‘남성 전용’이라고 못 박지는 않았지만 남성들이 주 고객이다. 이발소의 ‘음지’ 분위기도 싫고 여성 중심의 미용실은 불편하기 때문이다. 예 대표에 따르면 10명 중 8∼9명은 다시 방문한다고. “단골 고객들은 머리모양뿐 아니라 목 뒷라인, 귀밑, 눈썹 등 아주 작은 부분까지 세심하게 신경 쓰는 편이다.”

고풍스러운 내부 분위기는 이발소에 대한 아련한 로망만 남기고 촌스러움을 날렸다. 코를 찌르는 파마약 냄새도 없다. 소위 ‘아줌마 수다’가 없다는 것도 강점이다. 일본에서는 이러한 바버숍 콘셉트의 이발소를 보통 ‘맨즈 살롱(Men’s salon)’이라고 부르는데, 한국보다 수년 앞서 도쿄(東京) 오모테산도(表參道) 등을 중심으로 속속 들어섰고, 남성 이발 문화와 트렌드를 주도하고 있다. 바버숍의 부활은 ‘고향’인 미국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복고풍 이발소’가 인기를 끌면서 이발 산업이 때아닌 호황을 맞고 있는데, 온라인 쇼핑몰과 피부용품 전문점에서 고급 면도솔, 면도칼 연마용 가죽끈 등 전통적인 면도 용품들이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은퇴자들 사이에서는 이발사 면허를 따는 게 유행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 사치 혹은 허세?…그저 남자가 ‘편하게’ 드나드는 곳 = 앞서 말끔하게 머리손질을 마친 60대 신사가 가운을 벗고 일어선다. 부토니에(왼쪽 가슴에 다는 작은 장식)와 행커치프까지 갖춘 클래식 슈트가 드러난다. 남성미가 물씬 풍기는 포마드(pomade) 스타일 헤어가 옷차림, 그리고 복고풍 인테리어와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 예 대표는 “국내 바버숍 붐은 옷, 헤어 등 ‘클래식 스타일’이 유행하는 것과도 연결돼 있다”고 설명했다. 이 신사가 계산을 하고 숍을 나서니 고급 승용차 앞에 기사가 대기 중이다. 혹시 바버숍엔 ‘아무나’ 올 수 없는 게 아닐까 생각하는 찰나, 숍 앞 테라스에서 커피를 마시며 기다리던 30대 초반 남성 둘이 들어선다. 압구정 인근 직장인인 이들은 “여성 손님들로 붐비는 일반 미용실과 달리 예약만 하면 조용하고 여유롭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며 바버숍 예찬론을 펼쳤다. 그러면서 “물론, 헤어 스타일링이 우선적으로 마음에 들기 때문에 온다”고 덧붙였다.

최근 바버숍을 표방한 헤어숍이 늘어나면서 이를 럭셔리한 이발소 정도로 오해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보다는 ‘남자가 편하게 드나들 수 있는 장소’가 더 맞다. 블레스 외에도 한남동 ‘헤아’, 홍익대 인근 ‘나씽 앤 나씽’ 등이 꽤 알려진 바버숍인데, 습식면도와 머리손질 외에도 슈케어(구두관리)를 받고 시가, 위스키 등을 즐길 수 있는 곳도 있다. 한마디로 남성들의 사교·복합문화공간인 셈. ‘니즈’가 있다 보니 기업들도 단발성 바버숍 체험행사를 열기도 하는데, 최근 남성 편집숍 ‘루이스클럽’은 아예 바버숍을 매장 내에 배치해 눈길을 끌었다.

바버숍의 서비스 비용은 디자이너에 따라 보통 3만∼8만 원 선. 강남 일대 미용실 평균을 크게 넘어서지 않는다. 그러니 외관만 보고 사치나 허세라고 표현하는 것도 무리다.

박동미 기자 pdm@ munhwa.com

이미지 크게보기 바버숍에서는 머리손질 외에 세심한 면도 서비스 등을 받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