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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조/경희대 교수·정치학

세계의 주요 분쟁 지역을 살펴보면 대개는 ‘인종 갈등’과 연결돼 있다. 여기서 인종이란 단순히 같은 혈통의 집단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종족·종교·언어와 같이 태생적인 속성을 바탕으로 정체성이 형성된 집단을 뜻한다. 이 인종 간에 갈등이 일어나는 것은 기왕에 있던 인종적 차이에 대한 인식이 정치·경제적 갈등의 와중에 강화된 데서 비롯한다는 것이 대다수 학자의 공통된 분석이다. 이들은 인종적 차이가 인종갈등으로 이어지는 과정의 정치인들 역할에 특히 주목한다. 즉, 인종갈등은 정치인들이 자신의 이익과 목적을 위해 인종 의식을 부추기고 활용한 결과라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인종 의식에 근접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지역감정일 것이다. 인종 의식과 유사하게 지역감정은 출신 지역이라는 변화 불가능한 속성에 대한 원초적 애착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런 애착 자체야 당연한 것일 수 있지만 이를 조장하고 활용한 것은 1970년대 이후 정치인들이었다. 문제는 지역감정이 일정한 수준을 넘어서면 다른 모든 고려는 이에 매몰돼 버린다는 사실이다. 정강(政綱)·정책을 바탕으로 한 건전한 경쟁과 합리적 선택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지역감정은 오랫동안 한국 정치 발전의 커다란 장애물로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종필 전 국무총리 등 이른바 3김(三金)이 정치 무대에서 퇴장한 이후 지역감정은 상당히 약화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최근에는 국민 사이에서도 지역감정을 극복해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는 조짐들이 나타나고 있다. 6·4 지방선거에서 각각 부산시장과 대구시장 후보로 출마한 범야권 오거돈 후보와 김부겸 새정치민주연합 후보가 당선권에 육박하는 표를 얻은 데서 변화의 징후를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흐름에 찬물을 끼얹는 사건이 최근 발생했다. 지난 24일 전남 순천·곡성 보궐선거에 출마한 새정치연합 서갑원 후보가 보도자료를 내고 “세월호 참사와 유병언 수사의 모든 책임을 전남 출신이 뒤집어쓰고 있다”고 주장했다. “전남에만 책임을 묻는 것을 엄중히 규탄한다”는 말도 했다. 정순도 전남지방경찰청장과 우형호 순천경찰서장이 직위해제된 배경이 전남 출신이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들이 직위해제된 것은 유병언 씨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명백한 부실 수사 때문이었음은 국민 모두가 잘 아는 일이다. 이들의 직위해제는 경찰 지휘 라인을 문책(問責)하는 당연한 조치로, 다른 지역 출신이었더라도 문책이 달라졌을 리 없다.

서 후보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국회의원 시절 보좌관을 지냈고, 대통령 시절 청와대 비서관을 거친, 그야말로 ‘노무현의 남자’다. 지난 22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도 ‘노무현식 정치’를 하겠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 후보가 지역감정 해소를 위해 애썼던 노 전 대통령과 달리 지역감정을 부추기는 발언을 한 것은 선거 판세와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보는 게 자연스러울 것이다.

순천·곡성 선거구는 새정치연합의 텃밭이나 다름없는 지역이었지만 이번 선거에선 새누리당 이정현 후보가 서 후보와 접전을 벌이고 있다. 서 후보의 주장은 지역감정을 자극해서라도 표를 모아보려는 계산이겠지만 이는 시대의 흐름과 요구에 역행(逆行)하는 선동 행위다.

문제는 서 후보만이 아니라는 데 있다. 김한길 새정치연합 공동대표 또한 지난 22일 서 후보 지원 유세에서 박근혜 정권 들어 요직에 기용된 호남 사람 찾기가 바다에서 바늘 찾기와 같다고 운운하면서 지역감정을 자극했다. 서 후보도, 새정치연합도 지역감정의 망국적 망령을 되부르는 행위를 즉각 중단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