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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호/논설위원

러시아 화가 카지미르 말레비치(1878∼1935)가 1915년에 그린 가로·세로 각각 106㎝ 크기의 단색화(單色畵) ‘검은 정사각형’을 두고, 서양미술사를 전공한 우정아 포스텍 교수는 이런 요지로 설명한 적이 있다. “그것은 그가 선택한 절대적으로 순수한 형태였다. 검은색은 모든 것을 포괄한 색이고, 정사각형은 돌리면 원이 되고 나누면 직사각형이나 삼각형이 되는 근본적 형상이라는 것이다. 상하좌우의 구별이 없으니 방향의 옳고 그름도 없고, 누구나 그릴 수 있으면서 그 누구도 다른 사람보다 더 빼어나게 그릴 수 없다는 점 등에 착안한 셈이다.”

1970년대 초에 미학적 특성이 뚜렷한 한국 고유의 단색화를 개척한 거장(巨匠)들의 작품은 말레비치를 떠올리게도 한다. 정상화(82) 화백의 단색화들도 그렇다. “단순화해야 본질을 정확히 볼 수 있다. 말이 많으면 못 쓴다. 그림도 그렇다”고 믿는 그의 예술관·세계관과 말레비치의 인식이 일맥상통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세계적 명성의 정 화백 작품도 언뜻 보면 단순하기 그지 없다. 프랑스에서 창작하던 1983년 대한민국에서 전시회를 열기 위해 그가 말아서 가지고 들여온 작품들을 살펴보던 공항 세관원이 “그림은 어디 있느냐”고 묻기도 했었다. 프랑스와 일본에서의 유학 생활을 거쳐 1992년 완전히 귀국한 이래로도 단색화에만 매달려온 그의 작품 창작은 ‘그린다’기보다 ‘뜯어내고 메우기를 반복하는 일을 한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방식이다. 캔버스에 5㎜ 두께의 고령토를 발라서 말린 뒤, 가로·세로 규칙적 간격으로 접어 고령토를 떼어낸 자리에 아크릴 물감을 바르고, 또 말려서 접은 뒤 떼어내고 다시 바르는 작업을 반복한다. 한 작품에 길게는 1년이 걸리는 지난(至難)한 작업 과정을 거쳐, 흰색·파란색 등 단색이지만 작은 격자 무늬마다 미세한 차이를 품은 ‘시간의 무늬’를 새기는 것이다.

한국 단색화 1세대를 대표하는 또 다른 거장 이우환 화백이 가장 존경하는 작가로 꼽기도 한 정 화백이 단색화 천착 40여 년을 정리하는 회고전을 서울 삼청로 갤러리현대에서 지난 1일 개막해 오는 30일까지 이어간다. “보이지 않는 것을 그리는 내게는 ‘과정’만 있을 뿐 ‘완성의 개념’이 없다”고 말해온 그의 초기작부터 최근작까지 45점을 통해, 최근 세계 미술 시장의 ‘단색화 한류(韓流)’ 실체도 체감할 수 있는 기회다. ‘시간의 무늬’를 가슴으로 곱씹어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