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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호/경희대 교수·정치학

요즘 미국정치는 겉으로만 보면 살벌하다. 공화당의 존 베이너 하원의장이 민주당 소속인 버락 오바마 대통령을 제소하겠다고 공언했다. 대통령이 법을 멋대로 집행하며 월권해 헌법을 훼손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에 대해 오바마는 물러서긴커녕 “어서 제소하라”고 응대한다. 오히려 공화당 측이 미국민의 뜻을 거스르고 있다며 비난을 퍼붓는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뛰어난 정치력을 지닌 두 경륜가, 베이너와 오바마의 고수(高手) 정치가 작용하고 있다. 이들은 각기 개인적 입장과 소속 당의 이익을 추구하면서도 미국정치 전체가 살고 국정 운영 전반이 제대로 움직이게 하는 높은 수를 두고 있다. 과연 선진국 정치다.

먼저, 베이너의 경우를 보면, 그는 이중 압력에 직면해 있다. 한편으로, 오바마를 혐오하는 극보수 진영의 세라 페일린 같은 정치가와 티파티 활동가들이 압력을 넣고 있다. 이 극보수 인사들은 의료정책부터 이민정책까지 오바마의 모든 의제를 반대하며 베이너와 공화당 지도부가 더 강경한 자세를 취하고 탄핵운동에 동참하라고 요구한다. 물론 정치 경륜이 높은 베이너가 이런 극단적 입장의 함정을 모를 리 없다. 탄핵 주장과 같은 극단적 행태는 평균적 유권자의 경계를 사고 불신을 일으켜 결국 11월 선거에 부메랑으로 돌아올 것이다.

공화당 최고지도자로서 선거 승리를 쟁취해야 하는 베이너는 이념적 감정에 사로잡혀 지나치게 반(反)오바마를 외쳐 승리를 날리기엔 너무도 막중한 위치다. 그렇다고 극보수 진영을 무시할 수도 없다. 공화당 지지 기반이 줄어들거나 분열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비판의 날을 세우지 않으면 이념적 극단세력뿐 아니라 온건한 주류 공화당 그룹의 사기마저 떨어뜨릴 수 있다. 이 역시 선거 승리를 위해 피해야 할 일이다.

이런 딜레마 앞에서 베이너가 택한 묘수가 바로 ‘오바마 케어’ 집행과 관련한 제소다. 오바마 케어법에 따라 피고용인들에게 의료보험을 제공해야 할 고용주가 의무를 이행치 못할 경우 제재를 받게 되는데, 이 규정의 집행을 자꾸 연기하는 오바마의 행정명령이 위법이고 위헌이라는 것이다. 이 제소가 절묘한 이유는 첫째, 탄핵보다는 극단적이지 않은 수단으로 극보수 진영의 요구를 어느 정도 들어주는 동시에 중간적 유권자를 소외시키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다. 오바마가 원해 통과된 오바마 케어를 그 스스로가 제대로 집행하지 않는다고 제소함으로써 명분 싸움에서 앞서고 반(反)오바마주의자뿐 아니라 중도적 유권자에게도 호소할 수 있는 것이다.

둘째, 오바마를 벼랑 끝으로 몰지 않아 국정 파탄을 막는 동시에 국정 책임을 오바마 측에 넘긴다는 점도 절묘하다. 논란이 되는 오바마의 행정명령은 불법 이민, 기후변화, 총기 소지, 동성결혼 등 여러 영역에 다수 있지만 오바마 케어로만 국한시켜 제소함으로써 국정이 총체적 교착에 빠지지 않도록 했다. 오바마 케어 관련 제소도 몇 년 동안 진행될 것이어서 그 전에 퇴임하는 오바마에게 큰 타격을 주지 못한다. 상징적으론 제소하되 실질적으론 오바마가 알아서 국정을 이끌라는 뜻이다. 그럼으로써 이제 국정상의 여러 문제는 오바마가 다 책임져야 하게 생겼다.

오바마가 베이너의 이런 고단수를 모를 리 없다. 속으로 고마워하고 있을 것이다. 제소 절차가 수년 끌 동안 각종 행정명령을 통해 의료는 물론 이민, 기업규제, 환경, 노동 등 제반 정책 영역에서 자기 뜻대로 국정을 이끌 수 있기 때문이다. 상징적 명분 차원에서의 비판은 마음 아프고 국정 책임을 짊어지는 것은 부담스럽지만 실질 차원에서 대통령으로서의 책무를 소신껏 펼칠 수 있게 된 것이다. 어차피 대통령과 소속 당으로서는 국정으로 정면승부를 걸어야 선거 승리를 노려볼 수 있다. 그러니 제소하라고 오히려 재촉하는 것이다.

이렇듯 미국정치는 끊임없는 갈등으로 점철되지만 그 이면에서 정치인들은 자기도 살고 상대방도 죽이지 않는 묘수를 찾으며 결과적으로 미국의 정치와 국정이 파탄나지 않도록 한다. 양당 주류 정치인 간의 암묵적 담합이라고 매도하기엔 그 결과가 미국 체제에 매우 긍정적이다. 공생의 미(美)를 절실히 찾을 필요가 있는 우리나라 정치인들이 새겨들을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