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기신론>에서 ‘계명자상(計名字相)’이란 말이 나온다. 내용인즉 이름에 홀리고 이름에 팔리는 인간의 의식을 말하는 것인데, 지금 이 시절의 ‘의식’이란 것이 바로 그런 것 같다.

간단히 예를 들어보자. 대학을 입학할 때도 그렇다. 학교 이름을 쫓아간다. 명문(名門)대학에 들어가는 것이 최우선이고 자신의 적성이나 관심 방향은 일단 뒷전이다. 취직할 때도 그렇다. 기업체의 이름에 홀린다. 유명(有名)한 것이 가치 판단의 기준이 된다. 상품을 살 때도 그렇다. 브랜드가 선택의 기준이다. 명품(名品)이라는 이름에 팔린다.

장래희망이 뭔가를 말할 때도 이름이다. ‘대통령’ ‘국회의원’ ‘의사’ ‘판사’ ‘교수’등으로 말한다. 이름을 쫒아간다. 무슨 일을 하고자 하는지, 그 일을 하는 동기가 무어고 그 계획이 어떤지를 말하는 게 아니라 이름이 앞선다.

선거에서도 이름에 팔린다. 소위 인지도를 말하고 지명도(知名度)가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한다. 또는 정당의 이름을 보고 투표한다. 문화행사를 해도 인기 강사, 인기 연예인들의 이름을 보고 사람들이 몰린다.

이렇듯 이름에 팔리고 이름에 홀린다. 명실상부(名實相符)라는 말도 있지만 이름에 팔리고 이름에 홀리는 우리네 일상은 오로지 이름(名)으로 계산하고 이름으로 헤아린다. 우리들의 판단이라는 것은 이름을 쫒아갈 뿐 실(實)과는 따로 놀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달리 말하면 실(實)을 볼 수 있는 눈이 없고 실(實)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없다는 이야기이다. 눈도 귀도 제 구실을 못한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니 거짓과 꼼수가 난무한다.

<대승기신론>에서 근본무명(根本無明)과 지말무명(枝末無明)을 말하는데, 근본무명은 너무 먼 이야기이니까 일단 차치하고, 지말무명에서 세 가지를 이야기한다. 지상(智相), 상속상(相續相), 집취상(執取相)의 세 가지로 이야기한다. 말하자면 이것들이 의식이 오염되는 근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계명자상(計名字相)은 지말무명에도 들지 못한다. 더 오염될 것도 없는, 시쳇말로 하자면 인간 막장의 의식상태라는 것이다. 집착의 실체조차 알 수 없게 된, 그냥 이름에 홀리고 이름에 팔리는 허깨비와 같은 상태라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생주이멸(生住異滅)의 멸상(滅相)이 계명자상(計名字相)이란 것이다.

여기서 시간이 마냥 흐른다고 인간이 발달하고 문명사가 진화할 수 있을까? 결코 그런 일은 없다. 진화의 관건은 근본에로의 가역성(可逆性)에 달려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이야기하기로 하자.

배영순(영남대 명예교수 baeysoon@yumail.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