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나오는 이야기인데 필자가 약간의 각색을 해보기로 하자.
술에 취한 운전사가, 브레이크가 고장이 난 차를 타고, 외등이 없는 어두운 골목길에서 운전하던 중, 담배를 사러 길을 건너던 B라는 사람을 치어 죽인 교통사고를 가정하자.

그러면 이 교통사고의 원인을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 최소한의 상식적 판단이라면, 운전자의 음주, 정비 불량의 차, 외등이 없는 어두운 골목, 이 세 가지를 종합적으로 이야기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꼼수가 개입한다고 하자. 그러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가령 운전자의 과실을 숨기고 싶은 사람들은, 운전자의 음주를 문제 삼지 않고, 자동차가 불량이다, 외등을 달지 않은 도시행정이 문제라고 주장할 것이다.

또 자동차의 정비불량을 숨기고 싶은 사람들은, 운전자의 과실과 도시행정의 문제만을 물고 늘어질 것이다. 그리고 도시행정의 문제를 숨기고 싶은 사람들은 운전자의 과실과 자동차 불량을 물고 늘어질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끝이 아니다. 워낙 혼탁한 세월이고, 조작과 기획연출이 발달한 세월이니까, 꼼수가 만발하는 세월이니까, 아주 기발한 원인론이 나올 수도 있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B라는 사람이 그때, 하필이면 밤늦은 시각에 길을 건넌 게 문제다’ ‘그때 길을 건너지 않았으면 죽지 않았을 것이다’ ‘담배를 사러가다가 죽었으니까 담배가 문제다’ ‘진작 담배를 끊었더라면 안 죽었을 텐데’ 이런 식으로 몰고 갈 수도 있다.

여기에 덧 붙여서 B라는 사람의 신상을 털어서, 평소에 술버릇도 좋지 않고 성격도 괴팍하다는 식으로 몰아갈 수도 있다. 그러면 교통사고의 원인은 어느새 ‘B라는 사람이 문제다’는 식으로 초점이 옮겨갈 것이다.

배영순(영남대 명예교수 baeysoon@yumail.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