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종/논설위원

‘세찬 바람이 불어야 어느 풀이 강한지 드러난다’는 뜻의 질풍경초(疾風勁草)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리더의 됨됨이는 위기가 닥쳐봐야 그 진가를 드러내는 법이다. 비단 역사속 위대한 인물이 아니더라도 회사, 정부 등 각 조직도 마찬가지다. 이준석 세월호 선장처럼 리더의 잘못된 판단 하나로 수백 명의 고귀한 생명을 사지(死地)로 몰아넣은 최악의 경우도 있지만, 작은 잘못과 무능(無能)이 모여 조직 전체가 위기 상황에 직면하는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일반 회사가 망하면 그 구성원들이나 주주들이 피해를 보지만 만약 정부가 이런 위기에 처하면 국가와 국민의 생명이 위태롭다.

100만 명을 넘어선 대한민국의 공무원은 자질면에서 세계 어느 나라 못지않게 뛰어나고 우수한 인재가 많다. 지금도 바늘구멍을 뚫기 위해 노량진 학원가 등에서 컵밥으로 끼니를 때우는 공시족(公試族)이 수 십만 명이 넘는다. 그런데 이런 우수한 인재들이 공직에 발을 들여놓기만 하면 복지부동(伏地不動), 무사안일의 조직문화에 빠져들고 만다. 문제 안 일으키고 학연·지연만 좋으면 승승장구해 장·차관이 되는 반면, 조금 창의적이고 튀기라도 하면 왕따가 되는 조직의 생리를 잘 알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21일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현장에 내려가 실종자 가족들을 만났더니 공무원들에 대한 불신이 너무나 컸다”며 “국민이 공무원을 불신하고 책임행정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난을 받는다면 그 자리에 있을 이유가 없다”고 강하게 질타했다. 공무원에 대해 박 대통령이 이렇게 불신감을 드러낸 것은 처음이다. 많은 국민이 알고 있는 현실을 대통령이 이제서야 느꼈다고 하니 좀 뜬금없기는 하다.

박 대통령은 정부 출범 때부터 공직 출신에 대한 선호도가 남달랐다. 조각 당시 서승환 국토교통부 장관 등 일부 학계 출신을 제외하면 총리를 비롯해 대부분의 장관이 고시 출신이다. 청와대 수석비서진도 다르지 않다. 이전 정권 때는 그나마 정치인 출신들이 내각에 들어가 군기반장 노릇도 하고 ‘계급장 떼고 붙자’는 호기도 부린 적이 있지만 박정부의 내각과 비서진 면면을 보면 오랜 공직생활에 ‘눈치보기’가 몸에 밴 인물만 수두록하다. 최근 공직을 떠난 한 인사는 국무회의 멤버 중 유일하게 ‘받아쓰기’를 하지 않다가 경질됐다는 씁쓸한 뒷얘기도 들린다.

문제는 이들 장관이 위기가 닥쳤을 때 하나같이 허둥대고 무능력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데 심각성이 있다. 세월호 침몰 사고가 터진 후 국정을 총괄·조정하는 정홍원 국무총리는 정부 내 10여 개의 대책위원회가 난무해도 조정하지 못했다. 현장에선 성난 가족들을 달래지도 못해 급기야 실종자 가족에게서 물병세례를 받기도 했다. 강병규 안전행정부 장관과 이주영 해양수산부 장관의 현장 지휘 능력은 부끄러울 정도다. 특히 중앙재난대책본부장인 강 장관은 경찰간부후보생 졸업식 때 사고 발생 보고를 받고도 기념사진까지 다 찍는 여유를 부리는 한심한 판단력을 보여주었다. 서남수 교육부 장관은 사고 당일 실종자 가족들이 있는 진도체육관을 방문해 식음을 전폐한 가족들 가운데 혼자 의자에 앉아 컵라면을 먹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까지 보여주었다. 이번 사건 이전에도 이미 간첩 증거 조작 사건의 책임이 있는 남재준 국가정보원장, 자질과 리더십 부재로 수 차례 경질 요구를 받아온 현오석 경제부총리, 무인기 침투 후 9일 만에 보고받은 김관진 국방 장관 등 리더십이 도마에 오른 각료가 한둘이 아니었다.

대통령이 공무원을 엄벌한다고만 윽박질러서는 하루아침에 쇄신되지 않는다. 세세한 것까지 모두 지시를 내리는 박 대통령의 ‘만기친람(萬機親覽)’식 국정 운영 스타일이 계속된다면 지시사항만 하는 체하는 공무원들의 체질이 바뀌지 않는다. 시간이 걸려도 알아서 움직이는 시스템을 만들어내야 한다. 이를 위해 우선 총리를 포함해 조각 수준의 전면적인 내각 개편이 반드시 필요하다. 한번 맡기면 좀처럼 바꾸지 않는 박 대통령의 인사 스타일은 장점도 있지만 지금은 고집으로밖에 비치지 않는다. 성수대교·삼풍백화점 붕괴로 YS(김영삼)정권이 휘청했듯이 국민은 세월호와 같은 일을 두번 다시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