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영어, 중국어, 말레이어, 타밀어 등 4개국어로 표시된 싱가포르 지하철역 안내문.

서정하/駐싱가포르 대사

싱가포르를 방문한 외국인의 눈길을 끄는 것 중 하나는 4개 언어로 표시한 공공장소의 안내 문구다. 영어와 함께 중국어, 말레이어, 타밀어로 쓰여 있는 이 안내 문구는 다민족 국가인 싱가포르의 특성을 잘 보여준다. 싱가포르 국민의 구성 비율은 중국계 74%, 말레이계 13.4%, 인도계 9.2%이기 때문에 이들의 모국어를 공용어로 표기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싱가포르에는 생활 풍습과 언어, 종교적인 관습이 출신 국가에 더 가까움을 느낄 법한 다양한 민족들이 동일한 나라의 국민으로 함께 살고 있다. 아시아인이라는 점 이외에는 공통점을 거의 찾기 어려운 세 민족이 한 지붕 세 가족이 아닌 한 지붕 한 가족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9월에 발표된 한 여론 조사 결과에 따르면 싱가포르인 10명 중 9명 이상이 다른 민족을 동료나 이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불과 50년 전에 불안정한 다민족 국가로 출범한 싱가포르가 국민통합과 사회적 안정을 이룰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일까. 이질적인 집단을 동질화하는 효율적인 정책을 펼쳤기 때문이다. 특히 싱가포르 특유의 다문화주의가 큰 몫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싱가포르 다문화주의의 핵심은 각 민족의 종교적·문화적 고유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는 무엇보다도 싱가포르의 언어정책에 잘 투영돼 있다. 싱가포르 정부는 일찍이 세 인종의 통합을 위해 모든 국민이 공식 언어로 영어를 사용케 하는 동시에 각 민족별로 모국어도 배우도록 하고 있다. 이 언어정책은 싱가포르 교육의 기반이 됐으며, 싱가포르의 세계화에도 크게 기여했다.

싱가포르 헌법은 소수 민족의 종교와 문화를 보호하는 내용을 명시하고 있으며, 각 민족이 정체성을 잃지 않도록 전통문화 보존을 제도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실제 중국계의 춘제(春節)와 석가탄신, 말레이계의 이슬람교 축제인 하리라야, 인도계의 새해 첫날인 디파발리와 같은 각 민족의 명절을 국가 공휴일로 지정하고 있다. 싱가포르의 국회의원들이 영어가 능통한데도 국회에서의 의사 진행이 4개 언어로 동시통역되는 것도 같은 이유다.

다문화주의는 다수민족과 소수민족 사이에 균열과 불화가 생기지 않도록 세심하게 배려하고 치밀하게 관리하는 각종 제도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HDB로 불리는 정부아파트를 보급할 때 각 민족별로 분배된 비율을 지키게 함으로써 여러 민족이 이웃으로 함께 살도록 유도하는 주택정책이 한 예다. 이러한 원칙은 교육 분야에도 적용돼 여러 민족의 어린 학생들이 학교에서 늘 함께 어울리고 있다.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집단선거구(GRC)의 정당 후보자들도 특정 민족으로만 구성하지 않고 소수 민족 후보자가 최소한 1인 포함돼야 한다. 법규로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정부각료와 고위공무원단도 여러 민족으로 구성돼 있다. 필자가 참석해 본 싱가포르의 국경일 기념행사와 축제에서도 그런 싱가포르의 특성을 체험할 수 있었다. 개방정책의 원동력은 바로 다문화주의라 할 수 있다.

현재 이곳 싱가포르의 한류 문화에 대한 관심은 폭발적 수준이다. 이는 다양한 문화를 거리낌 없이 받아들이고 존중하는 싱가포르 사회에 깊이 뿌리내린 다문화주의의 영향 때문이지 않을까. 이런 점에서 싱가포르는 한류 문화의 확산 거점이 될 토양이 잘 갖춰진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싱가포르의 다문화주의는 다문화 사회가 될 운명에 놓여 있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제 우리도 한국에 정착한 외국인 및 다문화 자녀들이 한국문화로 동화하는 것을 당연시하기보다는 그들의 다양한 문화를 인정하고 존중하면서 포용해나가는 지혜가 필요하지 않을까. 남북통일과 국민통합에 대한 담론이 활발하다. 다문화주의를 국민통합과 경쟁우위의 수단으로 활용하는 싱가포르의 경험에서 배울 점을 찾을 때다.

◆서정하(59) ▲서울대 정치학과 ▲외무고시 13회 ▲군축원자력과장 ▲주오스트리아대사관 겸 주비인국제기구대표부 공사 ▲바세나르체제이사회 의장 ▲교수부장 ▲주헝가리 대사 ▲주싱가포르 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