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이 주인공인 연극이 있을 수 있을까요? 흔히들 연극의 3요소로 무대와 배우, 관객을 꼽습니다만 극장 즉 무대라고 할 수 있는 공간이 연극의 주인공이 된다는 것은 쉽게 상상하기 힘든 일입니다. 하지만 분명 극장이 주인공인 연극이 지금 서울에서 공연되고 있습니다. 지난 15일부터 30일까지 서울 중구 예장동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에서 공연하는 연극 ‘남산 도큐멘타 : 연극의 연습 - 극장 편’입니다.

이 연극의 주인공은 공연장인 ‘드라마센터’ 자체입니다. 아니, 어떻게 공연장이 주인공이 될 수가 있느냐고요? 될 수 있습니다. 그것도 매우 훌륭한 주인공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연극엔 배우들이 출연합니다. 심지어 관객들도 무대 위에 등장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 극의 주인공은 명실상부 드라마센터입니다.

자, 이쯤에서 좀 더 자세하게 털어놓을까요. 연극 ‘남산 도큐멘타’는 바로 드라마센터의 역사와 그 주변, 즉 남산 일대에서 벌어졌던 한국현대사를 주요 소재로 하고 있습니다. 지난 1962년 4월 개관한 드라마센터는 한국 연극사의 영욕을 함께 보여주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아니, 연극사뿐만 아니라 한국현대사의 한 단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장소이지요. 조금만 눈을 돌려 드라마센터 주변의 건물들을 보면 옛 중앙정보부(국가안전기획부)의 흔적들이 손에 잡힐 듯합니다.

연극은 드라마센터가 개관한 이래 이 극장에서 만들어진 연극과 벌어졌던 사건들, 나아가 1960년대 이후 남산 일대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극장 안’으로 가지고 들어와 보여줍니다. 이를 통해 한국현대사와 이 극장이 만나는 지점을 짚습니다. 나아가 극장이라는 공간이 사회 속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진지하게 묻고 있습니다.

연극은 공연 전 프로그램인 ‘유령 산책’을 마치고 온 관객들이 무대 위로 들어오면서 시작합니다. ‘유령 산책’은 관객 중 신청자 20여 명에 한해 공연 직전 1시간 정도 드라마센터 주위의 남산 일대를 둘러보는 프로그램입니다. 이들이 무대 안쪽에서 들어오면서 연극이 시작되는 것이지요. 한국현대사의 생생한 현장을 목격하는 것뿐만 아니라 무대와 객석, 배우와 관객의 간격을 없애겠다는 의도도 포함돼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무대 위에선 배우들이 ‘햄릿’을 연습하고 있습니다. ‘햄릿’은 드라마센터의 개관작이라는 점에서, 연극과 현실의 관계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이번 공연에 중요한 재료로 쓰이고 있는 작품입니다. 무대 위 ‘햄릿’ 연습은 종종 정지되면서 1960∼1970년대 드라마센터와 남산에서 벌어진 사건들이 영상뉴스로 펼쳐집니다. 1962년 개관 이후 1년도 채 되지 않아 재정상의 이유로 폐관된 드라마센터는 결혼식장으로, 미8군의 재즈 공연장으로, ‘예그린 악단’의 연습장으로 사용되기도 했지요. 이후 1970년대 오태석의 ‘초분’을 시작으로 ‘태’와 ‘하멸태자’ 등 히트작들을 공연하면서 드라마센터는 다시금 공연장으로서의 기능을 되찾습니다. 어떤가요. 이번 주 남산예술센터에서 ‘극장이 주인공’인 독특한 연극 한 편을 관람해 보심이.

김영번 기자 zerokim@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