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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희 /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겸 일본연구소장

지난해 3·1절 기념사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입장은 천 년이 흘러도 바뀌지 않는다’는 강경한 메시지를 내놓았다. 광복절 기념사에서는 일본 지도자들에게 과거의 불행한 역사에서 기인하는 문제로 고통을 받는 분들에 대한 성의 있는 조치를 취할 것을 촉구한 바 있다. 이번 95주년 3·1절 기념사에서는 한·일(韓日) 양국이 진실과 화해를 위한 역사를 쓰기 위해 필요한 인식의 기반과 이를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조치들을 적시했다.

한·일 협력의 토대는 식민지 지배와 침략을 반성하는 역사 인식이며, 과거의 아픈 역사를 딛고 미래로 나아가려면 일본 정부의 용기 있는 결단이 필요하다는 점이 뼈대를 이룬다. 일본에 두 가지 구체적인 조치를 요구했다. 하나는, 무라야마 담화와 고노 담화의 계승을 통해 과거의 역사를 부정(否定)하는 오류를 넘어서야 한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지도자의 용기있는 결단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아베 총리는 무라야마 담화를 계승한다고 천명했지만, 그 중추적인 내용에 해당하는 식민지 지배와 침략에 대한 반성을 직접 언급하려 하지 않고 있다. 아베 내각은 이에 그치지 않고 위안부의 강제 연행을 인정하고 사과한 고노 담화를 검증하려는 조치들을 구체화하고 있다. 두 가지 요구는 박 대통령이 취임 초기부터 일관되게 제기하고 있는 원칙이다. 일본에 거듭 사과와 반성을 촉구한 게 아니라, 기왕에 일본이 표명해왔던 정부의 입장을 존중하라는 것이며, 과거를 부정하거나 왜곡하는 시도에 대한 단호한 거부 의사를 밝힌 것이다. 위안부 문제의 해결 요구가 핵심이다.

아베 내각이 위안부들을 강제로 연행하지 않았다는 점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은 근시안적이고 미시적이다. 위안부가 ‘자신의 의사에 반하여’ 위안부로 동원됐다는 본질을 호도하기 때문이다. 설령 위안부 피해자들을 동원할 때 물리적인 강제를 행사하지 않았더라도 일본군의 필요에 따라 조직적으로 동원된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일본군은 위안부의 모집·수송·위안소 설치 및 운영에 개입했다. 대부분의 피해자는 자신이 위안부로 일할 것이란 사실을 알지 못했다. 위안소에서 자신의 선택에 따라 일본군을 응대한 게 아니었다. 나아가 위안부라는 일이 싫어도 위안소를 떠날 자유가 없었다. 결국, 위안부의 동원이 구조적인 강제 아래서 자신의 의사에 반해 이뤄졌다는 역사적 책임으로부터 일본은 결코 자유로울 수가 없다. 이를 부정하면 할수록 일본은 인권과 여성의 권리를 부정하는 나라로 비칠 뿐이다.

일본 정부는 위안부 문제를 부정하거나 1965년 한·일 기본조약으로 문제가 종결됐다는 단순 논리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1990년대 초 자민당 정부는 고노 담화, 무라야마 담화, 아시아여성기금 조성을 통해 이 문제를 풀기 위한 진지한 노력을 했다. 이를 부정하는 것은 결국 일본의 정부 행위에 대한 자기부정일 뿐이다. 피해자 본인들이 일본의 조치에 만족할 수 없다면 이를 넘어설 수 있는 방법은 있는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용단을 내릴 필요가 있다.

한국도 품격 있는 대응이 필요하다. 우선, 한국 정부가 위안부 문제에 대해 부작위로 일관한 게 아니라, 이 문제를 풀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 왔으며, 일본도 성의를 보인 경위가 있음을 긍정적으로 평가해야 한다. 둘째, 일본 지도자가 용기있는 결단을 한다면, 한국도 위안부 문제에 종지부를 찍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그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해야 한다. 아울러, 현재는 한·일 모두가 과거사에 사로잡혀 있지만, 위안부 문제의 해결은 신뢰를 쌓는 첫걸음이자 미래 지향적 협력을 향한 여정의 시작이라는 대원칙에 합의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