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남자가 아무리 나이 들어도 바뀌지 않는 신분 하나가 있다. 아들로 사는 것이다. 나이가 들고 머리가 희어지고 빠져도 부모님께는 아들이다. 얼마 전 어머님을 집으로 모셔 왔다. 결혼해서 자녀들과 함께 살아온 지 25년 만에 어머님이 우리 집의 가족이 되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님은 늘 마음속에 내가 넘어야 할 또 하나의 산인데 넘어가지 못하고 주변만 맴도는 어쭙잖은 아들이었다. 어머님은 그 사이에 팔순 노모가 되셨다. 어머님을 집으로 모셔 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맞벌이하던 아내에게 짐을 지울 수 없었다. 늘 마음 한편에 남아 있는 아쉬움 그 자체였다. 어머님을 모셔 오는 것에 대해 자녀들도 흔쾌히 동의했고 아내가 나서서 어머님을 모셔 오자고 해줬다. 명절 연휴기간에는 가족 모두가 외출을 삼간 채 어머님을 모셔 오기 위한 집안 정리와 도배 및 어머님 생활공간을 마련하는 일에 집중했다. 꼬박 사흘 동안 똘똘 뭉쳐서 집안을 정리하고 도배를 하면서 서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었다. 가족 모두가 어머님을 맞이하기 위한 노력을 해주는 것이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아내는 한쪽 팔 근육에 생긴 통증도 표시하지 않은 채 앞장서서 모든 일을 감당해 줬다.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는 감동이었다.

어머님을 모셔 왔다. 어머님은 즐거운 마음으로 오셨지만 매사를 조심스러워하셨다. 나이 든 아들 집에 오셔서 잘 적응하고 싶으셨던 것이다. 팔순 중반 어르신의 모습 속에서 사랑하는 아들이 마음 쓸까봐 조심하는 것이 역력히 느껴졌다. 편하게 지내시라고 말씀드려도 어머님은 많은 것들을 조심스럽게 말씀하고 행동하셨다. 적응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오히려 어머님께 무심한 척 행동했다. 조금씩 조금씩 편해지시고 가족들도 어머님을 이해할 수 있는 시간들이 흘러가고 있다. 어머님을 모시고 살면서 요즘 부쩍 더 나이듦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나이 많으신 외할아버지의 막내딸로 성장하셔서 어렵고 힘든 세월을 보내 오신 내 사랑하는 어머님의 가슴속에는 눈물도 많고 한도 많다. 건강이 여의치 않으셔서 걷는 것도 조심조심하신다.

어머님은 아들 손을 잡으시고 “이제는 내가 아무 짝에 쓸모가 없어. 나이 드니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어. 그래서 아들에게 미안해”라고 말씀하신다. 바느질 솜씨 좋으셨고 담백하고 맛깔난 음식을 잘하시기로 소문났던 어머님의 음식 솜씨를 맛보는 일이 어렵다. 학교에서 공부하다 늦게 돌아온 날 저녁에 금세 지어 주신 어머님의 냄비밥 맛은 천하의 일품이었다. 이제는 다 옛날 일이다. 이제는 아무것도 하실 수 없지만 나에게는 어머님 자체가 가장 소중하고 귀하다. 어머님과 마주 앉아 밥을 먹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가족들은 이런 나의 마음과는 다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자녀들과 침대 대화를 시도했다. 안방 침대에 온 가족이 둘러앉아 편안하게 속마음을 털어놓는 우리 가정만의 독특한 대화시간이다. 아니나 다를까, 아이들은 많이 참고 있었다. 힘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우리끼리 만들었던 밤시간의 문화가 나이 드신 할머니의 초저녁 잠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조심조심했어야 했고 어르신 식습관 앞에서 아이들은 불편했던 것이다.

편안하게 자신들의 생각을 풀어 놓았지만 어머니의 아들인 나의 마음은 약간 섭섭해지려고 했다. 그런 나의 마음을 알아차린 막내가 “우리는 좀 힘들지만 아빠가 사랑하는 엄마니까 우리도 노력하고 있어요”라고 말해 주었다. 고맙고 미안했다.

leeyuesu@kore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