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김영일 악당이반 대표가 지난 14일 서울 성북구 성북동 악당이반 사무실에서 갖고 있는 오디오 시스템의 뛰어난 점을 설명하고 있다. 곽성호 기자 tray92@munhwa.com

국악전문 음반회사인 악당이반(樂棠利班)의 김영일(53) 대표는 스스로를 국악, 우리 소리에 미친 마니아라고 말한다. 당초 국내에서 가장 비싼, 가장 많은 오디오 시스템을 갖춘 오디오 마니아 취재를 위해 김 대표를 만났지만 그는 스스로 오디오 컬렉터, 오디오 마니아는 아니라고 손을 내저었다. 교과서에서나 만날 수 있는 오디오, 오디오를 좀 안다는 사람들의 숨을 턱 막히게 할 수억 원대의 명품부터 최신 제품까지, 자잘한 것들을 빼고 굵직한 것만 세어도 대략 150여 대에 이르니 오디오 마니아이긴 하다. 하지만 그는 음악을 즐기기 위해 오디오를 모으거나 오디오 자체에 빠져 수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소리를 녹음하기 위해 최상의 시스템을 갖추다 보니 ‘결과론적 오디오 마니아’가 됐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악당이반이 보유하고 있는 녹음 시스템은 국내 최고, 세계 최고 수준이지만 정작 자신의 집에는 오디오가 없다고 했다. 게다가 악당이반에 들어가는 돈은 매년 5억 원 정도. 하지만 국악의 현재를 반영하듯 음반은 팔리지 않아 수익은 거의 나지 않는다. 악당이반을 2005년 설립했으니 이제까지 대략 50억 원가량을 고스란히 까먹은 셈이었다.

이런 ‘절대 손실’을 지탱하는 것은 그가 악당이반 대표일 뿐 아니라 성수동에 4개, 강남에 6개, 성북동 본부까지 총 11개 스튜디오를 둔 영상회사 그루비주얼을 운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학에서 사진을 전공하고 미국 유학을 다녀와 1990년대 이미 성공적인 상업 사진작가가 된 그는 그루비주얼의 수익 중 10%를 악당이반에 쓴다고 한다. 물론 때때로 부족한 부분은 순전히 자신의 주머니에서 나가야 한다. 도대체 무엇이 그를 이런 억대 돈을 쏟아붓는 마니아의 길로 몰아넣었을까. 그 시작은 1994년 소리꾼 채수정과의 만남이었고, 좀 더 깊숙이 들어가면 부유하고 문화적인 집안 내력이 버티고 있다. 그를 지난 14일 서울 성북구 성북동 악당이반 사무실에서 만났다.

―사진작가에서 어떻게 국악으로 빠져들었나.

“1990년대 초 ‘창간돌’이라고 불릴 정도로 사진 디렉터로 여러 잡지를 창간하며 성공적인 사진작가로 일했다. 그러던 1994년. 한 잡지의 젊은 아티스트 특집을 위해 소리꾼 채수정의 사진을 찍게 됐다. 자연스럽게 소리를 하라고 하고 사진을 찍으려 했는데, 말 그대로 얼음이 돼 셔터를 누를 수 없었다. 유명한 기업 총수나 정치인 사진을 찍으면서도 주눅이 들지 않았던 내가 소리의 기에 눌려버렸다. 채수정에게 이런 느낌을 이야기했더니 그가 나를 구례, 남원, 강진 등 전국 곳곳의 고수들에게 데려갔다. 그 뒤 우리 음악에 완전히 반했다.”

―악당이반 설립은 어떻게 이뤄졌나.

“전국 각지의 숨은 고수들을 찾아다니다 1990년대 말 지리산에서 배일동이라는 소리꾼을 만났다. 폭포 밑에서 수련하는 진짜 미친 소리꾼이었다. 소리가 기가 막혀서 음반을 내라고 했더니 ‘누가 우리 같은 사람의 음반을 내주냐’고 말했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2000년부터 본격적으로 녹음작업을 시작했다. 기왕이면 좋은 녹음기기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업계에서 최고로 꼽히는 독일 노이만 M149를 구입했다. 이 마이크를 들고 전국 각지를 돌며 녹음을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2004년 말까지 마스터 테이프 300개를 만들었다. 그걸 들고 음반사를 찾아갔는데 그쪽에서 누구 망하게 할 일 있나며 단칼에 거절했다. 너무 충격을 받아 두 달 정도 일도 못하고 틀어박혀 있다 내가 직접 음반을 내기로 했다. 2005년 악당이반을 차렸다.”

―자연히 오디오 수집도 시작됐나.

“최상의 시스템을 갖추고 싶었다. 이왕 차린 것 끝을 보자는 생각에서 기기도 점점 보강했다. 예를 들어 영국 BBC 방송국이 현재 모니터로 쓰고 있는 ls3/5a, 국내 방송국이 한 대씩 갖고 있는 피라믹스 녹음 시스템도 있다. 방송국의 경우 피라믹스 녹음 시스템은 있지만 운영할 수 있는 엔지니어가 없다. 악당이반에는 엔지니어도 있다는 점에서 국내 최고다.”

―개인적으로 오디오와의 첫 인연은.

“집안 대대로 음악을 좋아했다. 조선 말 종로 2가에서 금은방을 7개 정도 운영한 할아버지가 음악을 좋아했다. 축음기를 두 개 두고, 클래식과 국악을 들었다. 명창 이동백과 박녹주가 식객으로 지내며 소리를 하기도 했다. 아버지도 오토바이를 타고 평양까지 가서 일본에서 나온 새 음반을 사서 들을 정도였다. 자연스럽게 나도 5, 6세 때부터 음반을 보면서 저기서 음악이 나오는구나, 음악이 나오면 참 아름다운 시간이 되는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 뒤 내가 결혼해 분가할 때 아버지가 내 출생 연도에 나온 1961년산 매킨토시 275 파워앰프와 마란츠 7 프리 앰프 두 개를 결혼선물로 줬다. 여기에 영국 린사의 보급형 아식스 모델 턴테이블을 연결해 음악을 들었다. 하지만 국악에 빠지기 전까지 오디오에 대해 특별한 생각도 욕심도 없었다.”

―악당이반 수익은.

“이제까지 국악음반 86종을 냈는데, 매년 산조 음반의 경우 10장, 판소리 20장 정도 팔린다. 늘 마이너스 100%다.”

―앞으로 전망은.

“앞으로도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 같다. 다만 나는 기록을 할 뿐이고, 국악이 우리 사람들과 소통되고 공유되기를 바랄 뿐이다. 음반을 만드는 작업은 이런 공유를 위한 기반을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컬렉터로서도, 음반제작자로서도 종착역은 있게 마련이다. 그 종착역이란 내가 아무리 많은 것을 갖고 있어도 세상을 떠날 때는 아무것도 갖고 갈 수 없다는 것이다. 최근에 악당이반의 정관을 바꿨다. 만약 이익이 나면 3분의 2는 사회에 환원하기로 했고, 최악의 경우도 오디오 시스템 등을 모두 처분해 남는 자산 역시 사회에 환원키로 했다.”

최현미 기자 chm@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