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오정근/아시아금융학회장, 한국경제연구원 초빙연구위원

35년 전 한국은행 업무계장으로 일한 적이 있다. 그때 한국은행은 은행감독권도 있었고 한국은행에 재할인을 받으러 온 은행의 어음할인, 즉 대출이 정당하게 이뤄졌는지를 심사하는 기능도 있을 때였다.

당시 가장 큰 문제가 많은 기업이 실제 상거래는 없는데도 거래가 있는 것으로 위장해서 거액을 대출해 가는 일이었다. 그렇게 대출해 간 돈들은 부동산 투기 등에 쓰이곤 했다. 이래서는 안되겠다는 나름대로의 사명감을 가지고 늦게까지 심사업무와 씨름하곤 했다. 1980년대 후반 금융 자율화 바람으로 한국은행은 더 이상 그런 기능은 하지 않게 되고 금융위기 후 은행감독권도 넘어갔다.

이번에 하나은행·KB국민은행·농협의 KT 자회사 3000억 원대 부실사기대출 사건은 35년 전을 떠올리게 했다. 위조매출채권을 이용한 거액대출 등 한국 금융은 외형만 커졌지 35년 전과 달라진 게 없다는 한심한 생각마저 든다. 게다가 연초에 터진 개인 금융정보 유출대란 등 잇단 금융 사고로 도무지 금융이 무엇인가, 기본은 돼 있는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이러니 한국 금융은 한국경제를 먹여 살릴 고부가가치 서비스산업으로 발전하긴커녕 날로 뒷걸음질치고 있는 것이다.

금융의 기본은 예금자와 투자자의 자금을 위임받아 관리하고 기업 등 수요자에게 중개하는 자금중개 기능이다. 이는 대출 전의 사전심사와 대출 후의 대출자금 운용 실태를 점검하는 사후 모니터링이다. 이 기능만 제대로 작동되면 웬만한 사기나 부실 여신은 걸러낼 수 있다. 이런 기능은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다. 산업과 기업을 분석할 줄 아는 여신심사 인력과 제도가 구축돼 있어야 한다. 여기에다 혹시 문제가 있을 경우를 대비해 크로스체크하는 독립적인 리스크관리 제도도 있어야 한다.

이러한 금융기관 내부통제 제도가 제대로 작동되고 있는지를 검사하고 감독하는 외부통제 제도가 금융감독 제도다. 만약 금융기관 내부통제 제도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고 있을 경우 감독 당국은 문제점을 사전에 적발하고 시정 조치해야 한다. 2011년 저축은행 불법대출 사건에서부터 최근 부실사기대출 사건에 이르기까지 잇달아 터지는 금융 사고들은 한국 금융에서 이러한 내외부통제 제도가 제대로 작동되고 있지 않음을 보여준다. 서민금융을 취급하던 국민은행과 농협에서 잇달아 사고가 터지는 것도 예사롭지 않다. 기업금융을 취급한 후 서민금융과는 질적으로 다른 고도의 전문 심사 인력과 리스크관리 제도를 제대로 구축하고 있는지 의구심마저 갖게 한다.

관련자들 문책만으로 사고 재발이 예방되는 게 아니다. 근본적인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 금융기관들은 여신심사와 리스크관리 제도가 제대로 구축, 작동되고 있는지를 점검하고 보완해야 한다. 기존 인력으로 안되면 외부에서 우수 인력이라도 수혈해야 한다. 은행다운 인력과 제도를 가지고 있어야 은행이다. 지주회장·은행장·사외이사 등 경영진도 금융에서 잔뼈가 굵어 여신심사와 리스크관리를 뼛속 깊이 알고 있는 금융인이 맡아야 한다. 산업화시대에 제한된 자금을 배분하기 위해 정부가 금융을 좌지우지하던 시스템으로는 안된다.

감독 당국은 금융기관들이 이런 인력과 제도를 구축하고 있는지를 상시 점검하고 미비한 경우 시정 조치하고 그래도 안되면 기업금융에 제약을 가하는 강력한 조치를 해야 은행다운 은행으로 새롭게 태어날 것이다. 동양증권사태처럼 불완전판매와 내부거래가 주요 검사감독 사항인 시장감독과 여신심사·리스크관리가 주요 검사감독 사항인 금융기관 감독을 함께 하는 지금의 통합감독 제도가 잇단 금융 사고 예방에 적절한지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