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국립극장 의상실에서 무대 의상을 살펴보는 정구호 씨는 “좋아하는 분야를 즐기며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다 보면 새로운 문이 열린다”고 말한다. 정하종 기자 maloo@munhwa.com

서울 중구 장충동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지난 6∼8일 막 올린 국립무용단의 ‘묵향’ 공연은 여백이 돋보이는 한 폭의 수묵화 같은 작품이다.

온통 흰 무대 위로 매란국죽 사군자를 연상케 하는 영상이 펼쳐지고 감각적인 현대미술 같은 장면이 연출됐다. 부풀린 치마, 긴 도포 자락 아래로 춤사위가 슬쩍 드러나며 색다른 긴장감을 불러일으켰다.

‘묵향’은 윤성주 국립무용단 예술감독이 작고 무용가 최현의 ‘군자무’를 토대로 안무한 창작춤이다. 이 무대는 연출자가 패션브랜드 ‘구호(KUHO)’의 디자이너로 각인된 정구호(51) 씨라는 점에서 공연 전부터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사실 그는 1990년대 후반부터 영화·무용 장르와 지속적으로 협업해온, 문화가에서 익숙한 이름이다. 게다가 그는 패션 디자이너로는 이례적으로 2003년부터 10년간 제일모직 전무의 직함으로 여성복 비즈니스를 이끈, 튀는 이력의 주인공이다.

‘묵향’은 지난 11월 중순 대기업 임원 디자이너라는 타이틀에서 벗어난 그가 처음 선보인 작품이다. 지난해에도 국립발레단의 ‘포이즈’, 국립무용단의 ‘단’ 연출을 맡았지만, 그 작품들이 디자이너로서 ‘여기’에 가까웠다면 이번 작품은 무대에 집중한 신작이다.

패션 디자이너에서 공연 연출자로 새로운 삶을 시작한 그는 이미 내년 공연 예정인 국립무용단의‘더 게임’과 LG아트센터의 공연프로젝트 ‘심플 라이프’ 등의 연출을 맡았다.

‘묵향’을 통해 그는 한복의 치마를 풍성하게 부풀리고 남성의 도포 자락을 무릎 아래까지 길게 늘어뜨리는 등 부분적인 과장과 생략을 통해 전통적이면서도 모던한 이미지를 추구했다. 가야금산조와 거문고산조 및 정가 등 국악에 더블베이스와 바이올린 등 서양악기의 소리를 더했고, 병풍처럼 무대에 두른 흰 스크린 위로 국화, 붓글씨 등을 담은 영상을 투사했다. 춤과 음악에서 관객들이 자칫 지루하게 느끼기 쉬운 전통의 요소를 유지하되, 현대감각의 무대를 연출한 것

“회사 생활을 10년 했으니 충분히 긴 시간을 일한 것 아닙니까. 좀 더 자유로워지고 싶어서 퇴직했습니다. 무얼 할 것인지 머릿속에 이런저런 생각이 많습니다만, 공연 쪽에서 나를 필요로 하는 일에 보다 더 집중하고 싶습니다.”

지난 9일 오전 서울의 한 호텔 커피숍에서 만난 그는 “모처럼 꽉 짜인 일과에서 벗어나 여유를 즐기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또 “주변에서 앞으로 무얼 할 것이냐고 묻는다”면서 “솔직히 모든 게 열려 있는 물음표의 상태”라고 덧붙였다.

“회사 다니며 공연 일을 할 때는 퇴근후 저녁시간이나 주말시간을 이용했지요. 이번엔 근무시간을 의식하지 않고 보름여 무대에 완전히 몰두해 작업했습니다. 18세 때부터 늘 두세 가지 아르바이트를 했으니, 요즘처럼 홀가분하게 지내는 것은 처음입니다.”

그는 “패션 디자이너로서의 경험을 토대로 공연에서 자신에게 맡겨지는 분야에서 끊임없이 새로움을 추구하며 실험과 도전을 펼치겠다”고 밝혔다. “패션은 너무 좋아하는 일이라 완전히 멀어질 수는 없을 겁니다. 패션의 요소를 유지하면서 무용 공연을 비롯해 오페라, 국악 등 다양한 무대를 함께 만들어 보고 싶습니다.”

1997년 패션브랜드 ‘구호’를 시작한 패션 디자이너로서 그는 2003년 제일모직 상무로 입사, 2010년 전무로 발령받아 10년간 대기업의 패션 비즈니스를 이끌었다. 대기업 임원 디자이너로서 그는 영화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 ‘황진이’의 의상을 맡아 대종상 영화제 의상상을 수상했다.

그는 “다양한 요소의 선택과 재조합이 이뤄지는 무대 작업은 회사 일에서 벗어나 흥미로운 도전이자 즐거운 놀이 같았다”며 “앞으로도 새로운 도전을 희망한다”고 말했다.

지난 10년간 패션쇼와 공연 무대의 연출을 병행해온 그는 “1회적인 패션쇼와 달리 공연은 다듬어서 새롭게 재공연이 가능하므로 더 매력적이다”면서 “각 장르 전문가들의 협업도 흥미롭다”고 지적했다. 여러 달 치열하게 준비한 패션쇼는 단 몇분 만에 끝나버리고 똑같은 쇼의 재연 기회가 없어 아쉬움이 컸다는 것. 하지만 공연은 수정 보완을 거쳐 새로운 무대를 선보일 수 있어 창작의 만족도가 더 크다는 이야기다.

“한 분야를 오래 하면 어느 정도 뭔가 보이고 달인, 명인의 경지에 오른다지요. 그런데 패션은 정답도 없고 하면 할수록 물음표의 상태가 되더라고요. 공연은 결과를 예측할 수 없다는 점은 패션과 마찬가지지만 그런 중에서도 답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얻게 됩니다.”

무대와의 첫 인연은 미국 뉴욕에서였다. 텍사스 휴스턴대와 뉴욕 파슨스 디자인스쿨에서 광고디자인을 전공하고, 요리학교도 다녔던 그는 1990년대 중반 뉴욕에서 레스토랑과 바를 운영했다. 그 무렵 안성수, 안은미, 안애순 씨 등 또래 무용가들과 어울렸다. 공연을 보러 다녔고, 무용 의상을 만들며 자연스러운 협업이 이뤄졌다.

안성수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와는 그후 줄곧 각종 무대에서 다양한 협업을 지속적으로 펼쳐왔다. 두 사람이 연출과 안무를 맡았던 지난해 국립발레단의 ‘포이즈’와 국립무용단의 ‘단’을 통해 ‘연출가 정구호’가 세인에게 드러나는 계기가 됐다.

“무용 무대에 관심이 많지만 제가 직접 안무를 하는 건 아니거든요. 무용이 보다 잘 보이도록, 음악·미술·의상 등에서 다양한 제 경험을 나누는 협업이 제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앞으로 펼치고 싶은 일에 대해 그는 시각적 요소에 비중을 둔, ‘비주얼 디렉터(Visual Director)’ 혹은 ‘크리에이터(Creator)’란 용어에 가까울 것이라고 지목했다.

그는 또 패션, 무용은 물론 음악, 미술, 요리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한 관심을 드러낸다. 지난해 발레단과의 협업 이후 발레를 배우고 있다. 그는 “운동 삼아, 또 무대를 보다 잘 알기 위해 시작한 발레수업은 내 몸을 알아가고 시종 웃음이 이어지는 힐링타임”이라고 소개했다.

“세계적으로 각 장르 간의 구분이 없어지고 서로의 융합이 활발한 시대가 아닙니까.”

그는 “각 분야 전문가들과 함께 늘 새로운 무엇을 이뤄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며 “패션브랜드 ‘구호’를 해외에 진출시킨 것처럼 우리 공연을 해외에도 적극 알리는 작업에 동참하고 싶다”고 다짐했다.

신세미 기자ssemi@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