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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벽 / 클로드 케텔 지음, 권지현 옮김 / 명랑한 지성

장벽을 통해 ‘인간의 또 다른 역사’를 되짚어본다. 프랑스 역사학자인 저자가 말하는 장벽은 그러나 단순히 침략자로부터 무언가를 보호하기 위한 원초적인 장벽이 아니다. 요새나 성곽과 같은 방어벽이 아닌 ‘정치적’의미를 지닌 장벽을 통해 인류의 역사를 재조명하고 있다.

세계 최고이자 최대의 건축물로 손꼽히는 만리장성 같은 황제의 장벽, 게토의 장벽과 같은 몽매주의 장벽, 통곡의 벽과 같은 종교적 장벽, 철의 장막과 같은 정치적 장벽 등을 통해 인류가 어떤 전략으로 역사를 만들어 왔는지 살핀다.

저자는 특히 베를린 장벽에 주목한다. 권위를 상징하고 제어하며 경계를 만들고 배제하며 금지하는 정치적 장벽의 대표적인 사례로 베를린 장벽을 꼽는다. 프랑스에서는 베를린 장벽의 장벽(mur)이라는 단어를 대문자로 표기하고 베를린을 빼고 그냥 ‘장벽(le Mur)’이라고 쓴다. 저자는 “베를린 장벽은 배척과 물리적 분리를 상징하는 최고봉으로 우리 기억 속에 남아 있다. 베를린 장벽보다 더 정치적인 벽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이런 정치적 장벽은 고대에도 존재했다. 군사적 기능에 국경 기능을 합친 하이브리드한 장벽이었다. 중국의 만리장성이나 로마제국의 리메스 게르마니쿠스가 대표적이다. 최후의 방어선이라는 뜻으로 쓰는 ‘마지노선(Maginot Line)’이라는 말도 1차 대전 후 독일의 호전주의에 맞선 프랑스의 평화주의를 상징했다.

베를린 장벽 이전에도 온갖 종류의 벽이 있었다. 1720년 의학적 목적을 가진 페스트 벽이 건설되기도 했으며, 18세기에 세워진 징세청부인의 벽은 세금을 징수하기 위한 벽으로 파리 시민들의 원성을 샀다. 저자는 오늘날 한창 기능을 발휘하고 있고 더 나아가 규모도 더 커지고 업그레이드되어 가는 벽들이 20개쯤은 된다고 말한다.

남북한을 가르는 휴전선, 그리스와 터키 사이의 오래된 분쟁의 결과물인 키프로스의 그린라인, 에스파냐와 모로코 사이의 정치적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서사하라의 모래 장벽, 종교와 국경 분쟁이 얽히고설킨 인도와 중동의 장벽 등이 그렇다. 거기엔 불법 이민을 막는다는 명목하에 세워진 미국과 멕시코 사이의 부시 장벽, 에스파냐의 월경지에 세워진 세우타와 멜리야의 장벽 등도 있다.

그런가 하면 세계에서 가장 큰 논쟁과 분리의 장벽이라고 할 수 있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가르는 분리의 장벽도 있다. 중동에는 그런 벽이 여덟 개나 있어 이 방면에서 최고기록을 갖고 있다.

더욱 심각한 것은 배제, 배척, 공동 폐쇄라는 특징을 갖고 있는 새로운 유형의 장벽이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점이다. 만리장성부터 시작해 오늘날까지 장벽의 역사를 두루 살핀 책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부자동네를 에워싸는 ‘게이티드 커뮤니티(Gated Community)’가 그 같은 유형의 대표적인 장벽이다. 책에 따르면 미국에서만 800만 명 이상이 3만 개의 게이티드 커뮤니티에 거주한다.

서울에서도 임대 입주민과 일반 입주민이 서로 마주칠 일이 없도록 출입구와 엘리베이터까지 따로 갖춘 아파트가 등장해 한동안 떠들썩 한 적이 있었다. 게이티드 커뮤니티는 국가의 역할에 대한 불신, 공통된 계급 의식을 가진 사람들 간의 자발적 감금이라는 점에서 앞으로 심각한 사회 불균형, 사회 불만의 첨병이 될 가능성이 짙다.

저자는 세상과 단절하는 것이 아니라 위험하고 불편한 세상과 거리를 두고 싶어 담장과 CCTV, 진입로 가로막, 경비원을 두고 여러 사람이 함께 자발적으로 고립되는 이 장벽이 앞으로 가장 번성할 것으로 예측했다. “현재 지구의 운명을 관장하는 것은 평등도 아니고 만능 통행증도 아닌 불평등이다.” 세계 곳곳에 수많은 장벽이 있지만 빈부 격차로 발생한 장벽이 가장 우려된다는 지적이다.

김도연 기자 kdychi@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