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슈퍼태풍’ 하이옌(海燕·바다제비)으로 큰 피해를 입은 필리핀에 500만 달러를 지원하기로 결정하면서 올해 긴급구호예산 잔고가 ‘마이너스’를 기록하게 됐다. 13일 현재 남아있는 예산이 180만 달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정부는 필리핀 지원에 필요한 나머지 320만 달러를 다른 예산에서 전용하기로 하고, 예산당국의 승인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다. 중견국 외교를 주도하기엔 ‘실탄’이 너무 부족한 셈으로, 국격에 걸맞게 긴급구호예산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개발원조위원회(DAC) 회원국 평균 수준으로 끌어올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이날 외교부 등에 따르면 올해 긴급구호예산은 총 2000만 달러(약 236억 원) 수준에 불과한 데다, 현재 180만 달러 정도만 남았다. 올해 1월 시리아 내전상황에 따른 난민구호에 300만 달러, 4월 중국 쓰촨(四川)성 지진에 100만 달러 등 총 17건에 구호금을 지원하면서 예산이 거의 바닥났다.

올해처럼 지구촌에 대규모 재해나 사건·사고가 잇따라 발생하면 현행 예산 규모로는 감당이 불가능하다. 실제로 2010년에도 아이티 지진과 칠레 지진, 파키스탄 대홍수 등 대형 재해 3건에만 긴급구호예산 95억 원의 60% 이상을 소진한 바 있다.

이를 감안해 정부는 2010년 말 당시 공적개발원조(ODA)의 1% 미만이었던 긴급구호예산을 2015년까지 OECD 개발원조위 회원국 평균인 6% 수준으로 올리기로 결정했지만, 목표시점을 2년 앞둔 올해 예산은 여전히 ODA의 1.5% 수준에 불과한 실정이다. 특히 2004년 동남아 지진해일(쓰나미), 2010년 아이티 지진,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등의 사례에서 보듯 대형 자연재해가 갈수록 늘면서 긴급구호예산 확충도 시급한 과제가 됐다.

현행처럼 부족한 지원금은 예비비를 신청하거나 다른 예산에서 전용할 수 있지만, 그러다보면 집행까지 시간이 걸리면서 ‘긴급구호’ 시기를 놓칠 수 있다는 게 문제다. 정부가 2010년 8월 러시아에서 발생한 대형산불에 따른 재해구호를 위한 지원금을 확정한 뒤 예비비를 신청했는데, 곧바로 산불이 진화되면서 아예 예산을 집행하지 못한 사례도 있다.

외교부 관계자는 “정규예산이 실질수요보다 적게 편성돼 있기 때문에 매년 예산 부족 사태를 겪고 있다”며 “한국의 ODA 예산이 일본의 10분의 1 수준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필리핀에 500만 달러를 지원하는 것은 우리로서는 상당히 마음을 쓴 것”이라고 말했다.

신보영 기자 boyoung22@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