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재특회가 혐한시위를 펼친 뒤 도쿄 최대 한인타운은 ‘한류 성지’라는 명성이 무색할 만큼 한산해졌다. 사진은 도쿄 신오쿠보의 한인상가 밀집지역.

“글쎄요, 시위 여파라…. 잘 모르겠는데요.” “그런 건 왜 묻죠? 우리 가게는 장사 잘됩니다.” “미안하지만 혐한시위에 대해선 이야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지난 10월 22일 오후 일본 도쿄(東京) 최대 한인타운 신오쿠보(新大久保) 거리는 비교적 한산했다. 2003년 드라마 ‘겨울연가’의 폭발적인 인기를 업고 이 지역은 ‘한류 성지’로 거듭났다. 한식당, 술집, 옷가게와 식료품점 등 한국인이 운영하는 업소만 약 400여 곳. 도쿄 거주자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의 한류팬들이 관광버스를 전세내서 올라올 정도였다. 지난 몇 년 동안 신오쿠보 상권은 급속하게 팽창하다가 최근 제동이 걸렸다. 인터넷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신흥 우익 재특회(在特會·재일 특권을 허용하지 않는 시민 모임)가 혐한시위를 펼친 후 한류팬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것. 올 들어 벌써 열두 번의 시위가 있었다. 하지만 정작 가장 큰 피해자인 현지 한국 상인들은 말을 아꼈다. 행여 더 큰 불똥이 튈까봐서다. 경계의 눈빛으로 “잘 모르겠다”며 입을 닫은 사람들은 묵묵히 김밥을 말고, 호떡을 구웠다. 애써 변함없는 일상을 영위하려는 모습이었지만 줄어든 손님만큼, 심리도 위축돼 보였다.

◆명동처럼 북적이던 신오쿠보… 매출 절반으로 ‘뚝’= 일본 언론에도 소개되며 신오쿠보 ‘명물’로 떠오른 한 호떡가게 앞에서 유학생 김지연(여·26) 씨를 만났다. 도쿄 생활 3년째라는 김 씨는 “재특회의 혐한시위 이후 신오쿠보를 찾는 방문객이 확 줄었다”며 “지난해 봄만 해도 중국인 관광객들로 북적이는 서울 명동 거리처럼 발 디딜 틈이 없었다”고 전했다. 그는 “주말에는 오가는 사람들과 어깨를 부딪힐 정도였고, 이 가게 호떡을 먹으려면 30분 이상 줄을 서야만 했다”고 덧붙였다. 인근 옷가게에서 일한다는 30대 중반의 여성은 “그나마 식료품 가게와 화장품 가게에만 단골들이 드나들 뿐, 일본 전역에서 올라오던 관광버스도 거의 사라졌다”고 토로했다. 또 “쉬쉬하고 있지만 폐업한 곳도 있고, 다들 매출이 절반 이상 떨어진 걸로 안다”고 귀띔했다.

신오쿠보의 한 단체에 매일 자원봉사를 나온다는 노다 미요코(野田美代子·여·68) 씨는 “재특회의 재일 한국인 폄하 발언에 대해 대다수 일본인들이 동조하지는 않지만, 수백 명이 가두행진을 벌이며 거리를 점령하기 때문에 아무리 한류팬이라 해도 방문이 꺼려지는 게 당연하다”고 말했다.

◆교토(京都)·오사카(大阪)도 영향권… 쓰루하시(鶴橋) 상인들 “무섭다”= 야키니쿠(燒き肉·불고기) 가게가 몰려 있어 주말이면 불야성을 이루는 오사카 한인타운 쓰루하시도 일본 전역에 드리운 혐한 분위기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인근 교토에서 재특회 회원들이 교토조선초급학교를 대상으로 벌인 헤이트스피치(Hate Speech·특정 인종에 대한 혐오, 증오 발언)는 법원으로부터 1225만 엔(약 1억3475만 원)의 배상명령을 받을 만큼 사회적인 문제가 되기도 했다.

쓰루하시 한인 식료품 가게에서 일하고 있는 우에노(上野) 남주(여·54) 씨는 20여 년 전에 일본으로 건너온 소위 ‘뉴커머(New commer·1980년대 말 이후 일본에 정착한 한국인)’다. 우에노 씨는 “한국을 욕하는 사람은 늘 있었지만, 지난해 여름 이후 부쩍 늘었다”며 “한·일 간 작은 외교문제라도 발생하면 가게 앞에 침을 뱉고 가는 사람도 있다”고 전했다. 쓰루하시 한인타운에는 시장 주변을 돌며 “조선인은 떠나라”고 외치는 ‘단골’ 확성기차가 있다. 쓰루하시 주민들은 이미 익숙해져서 이 차는 거의 신경 쓰지 않는다. 그러나 1만 명이 넘는 회원을 거느린 재특회가 인터넷을 박차고 거리로 나온 것에 대해 그들은 전에 없던 ‘공포’를 느낀다고 했다.

◆극우단체 발호… 정치 우경화에 편승하다 = 욱일승천기(旭日昇天旗)를 앞세운 재특회 회원들은 ‘조선인은 죽어라’ ‘도둑 국가 한국’ ‘한국인을 죽이자’ 등 극단적인 구호를 외치며 한인 밀집 지역에서 가두행진을 벌여 왔다. 특히 일본이 2020년 하계올림픽 개최지로 선정된 후에는 보다 과격한 반한 시위를 재개했다. 인터넷 안에 숨어 있던 ‘넷 우익’이 노골적으로 자신들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 전문가들은 이 극우단체가 ‘강한 일본’을 외치며 우경화하는 정치권 분위기에 편승했다고 분석한다. 김민규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일본 정치권의 우경화는 한·일 관계를 냉각시켜 동북아 정세를 불안하게 할 뿐만 아니라 각종 극우단체까지 발호시켰다”며 “나라 전체가 ‘역사인식 퇴행’의 길을 걷고 있다”고 지적했다.

일본 시민사회에서도 이 극우단체에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다. 스스로 ‘정통 우익’이라 일컫는 기무라 미쓰히로(木寸三浩) 잇스이카이(一水會·일수회) 대표는 “재특회는 진삐라(チンピラ·양아치) 수준이다”며 “회원 대부분이 무직이거나 비정규직인데, 정부에 대한 불만을 재일 한국인에게 터뜨리는 건 매우 비겁한 짓이다”고 비난했다. 또 혐한 시위가 있는 곳에는 이를 반대하는 개별 일본인의 시위도 적지 않다.

하지만 재특회 등 극우단체의 기세는 당분간 꺾일 것 같지 않다. 지난 10월 교토조선초급학교에 대한 인종차별 발언으로 거액의 배상 판결을 받은 재특회는 4일 교토 중심부 가와라마치(河原町)에서 또다시 시위를 벌였다. 배상 판결에 대한 항의였다.

도쿄·오사카 = 글·사진 박동미 기자 pdm@munhwa.com

이미지 크게보기 도쿄 신오쿠보 한인상가에 위치한 한 잡화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