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야스쿠니 신사를 찾아간 지난 22일은 날씨가 흐렸다. 경내 배전 위 하늘이 어둡다. 그 모습이 마치 한·일 관계에 드리운 그림자 같은 모양새다. 일본 정치인들의 역사 인식이 퇴행하고, 아베 신조 총리가 연내 참배를 단행할 것으로 예측되면서, 군국주의의 상징 야스쿠니 신사가 또다시 도마 위에 오르고 있다.

일본이 거꾸로 가고 있다. 위안부·독도 관련 망언은 기본, 헌법을 개정하고 아예 ‘무력’을 회복하려고 한다. 최근엔 관동대지진 때 못지않은 한국인 차별발언도 난무한다. 분위기 조장을 하는 주체는 정치인들이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는 전쟁을 미화하고 있는 야스쿠니(靖國) 신사에 가고 싶어서 몸이 달아 있다.

신흥우익 ‘재특회’는 한인 밀집 지역에서 혐한시위를 벌여, 한류 열풍으로 북적대던 신오쿠보(新大久保)거리를 한산하게 만들었다. 이에, 조용히 활동하던 우익들도 서서히 수면 위로 올라오고 있다. 이 같은 일본의 우경화는 정치적으로 한·일 관계의 냉각을 불러왔고, 재일 한국인들은 경제적·심리적 피해를 고스란히 입고 있다.

문화일보는 일본의 이 같은 행보가 역사인식의 부재에서 나온다고 판단, 동북아역사재단과 공동으로 ‘거꾸로 가는 일본의 역사인식’ 시리즈를 기획했다. 일본 우익의 구심점 야스쿠니 신사의 정치적 함의부터 만화·잡지 등 반한 매체의 증가, 한인타운을 습격한 혐한 분위기까지 총 4회에 걸쳐 일본의 역사인식 퇴행의 현주소와 그 여파를 짚어본다.

# “사무이(寒い·추워)!” 빨간 기모노를 입은 여자아이가 양손을 꼭 쥐고 몸을 움츠린다. 지난 23일 도쿄(東京) 시부야(澁谷)에 자리한 메이지(明治) 신궁엔 ‘시찌(7), 고(5), 산(3)’을 기념하러 온 가족들이 가득했다. 일본에서는 자녀가 3세, 5세, 7세가 되면 신궁을 방문해 건강을 비는 풍습이 있다. 메이지 신궁은 한국 관광객들에게도 인기가 높다. 경내로 들어가는 입구부터 하늘을 가릴 정도로 높고 큰 나무들이 반긴다. 도쿄 시민의 ‘힐링’ 장소라더니 그 말이 꼭 맞다.

# 지난 24일 미에(三重)현 이세(伊勢) 신궁에는 비가 오는 날에도 수많은 인파가 북적였다. 이세 신궁은 한 해 참배객만 600만 명이 넘는데, 올해는 20년 만에 돌아오는 시키넨센구(式年遷宮)를 거행해 그 어느 때보다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시키넨센구는 20년에 한 번씩 신을 모신 건물을 새로 짓고, 이전 건물을 허는 의식이다. 도리이(鳥居·신사 입구에 세운 기둥문)를 지날 때마다 멈춰선 사람들이 고개를 숙여 ‘신’에게 인사를 올린다. 일본인이라면 누구나 평생 한 번은 꼭 이세 신궁에 가보고 싶어 한다더니 메이지 신궁과는 또 다른 경건함과 엄숙함이 느껴진다.

# 야스쿠니 신사 입구에는 메이지 시대 육해군 창설의 공훈자 오무라 마스지로(大村益次郞·1824∼1869) 동상이 서 있었다. 지난 22일 어두워질 무렵에 방문한 신사는 동상이 주는 위압감 탓에 더욱 스산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다. 경내 오른쪽 유슈칸(遊就館)에 들어서니 야스쿠니 신들의 사진과 유품이 전시돼 있다. 일본이 패전하기 전에 사용하던 전투기, 기관차, 대포 등 총포류와 전쟁관련 물품과 설명자료도 가득하다. 이쯤 되면 ‘전쟁 및 군사박물관’이라고 해도 될 듯싶다.

◆ 신궁 주위를 맴도는 아베…“야스쿠니에 가고 싶다”는 몸부림

일본인의 동경의 대상인 메이지 신궁과 이세 신궁은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오이타(大分)의 우사(宇佐) 신궁과 함께 일본 3대 신궁에 속한다는 게 첫 번째다. 또 다른 공통점은 평화로워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올해 이 두 신궁이 한 정치인에 의해 국제적으로도 유명세를 탔다는 것이다. 모두 아베 총리가 참배를 단행해 논란이 일었던 장소다. 아베 총리는 올해 초 메이지 신궁을 방문했다. 이는 2007년 1월 이후 6년 만이다. 당시에도 총리로 재직 중이던 아베가 ‘참배 논란’의 장본인이었다. 일본 국내에서는 “정교분리의 원칙을 위배했다”는 지적이 일었다. 주변국에서는 일본 정부의 우경화를 우려했다. 아베 총리는 이날 방명록에 ‘내각총리 대신 아베 신조’라고 기명했지만, 메이지 신궁이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일본 군국화를 이끈 메이지 일왕을 모시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간과할 수 없는 행위임에 틀림없다. 도쿄 시민과 한국 관광객의 ‘힐링’ 장소는 사실 ‘천황 신격화’의 시작점이었던 것. ‘우익’으로 대변되는 일본 보수층의 결속을 유도하기 위한 아베 총리의 정치적 속내가 빤히 보인다.

아베 총리가 이세 신궁을 방문한 것은 보다 심각한 도발이라는 평이다. 아베 총리는 이달 2일 일본 현직 총리로서는 전후 최초로 신궁의 전통의식에 참석했다. 20년 만에 한 번씩 태양신의 ‘신체’를 새로 지은 신전으로 옮기는 ‘시키넨센구’에 참가했다. 패전 이후 3번 있었던 이 행사에 일본 총리가 참석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세 신궁은 일왕이 아닌 일본 건국의 신(태양신)을 모셨지만, ‘천황 신격화’의 역사적 배경과 명분이 돼준다. 따라서 이세 신궁 방문은 정교분리의 원칙 위배뿐 아니라, 메이지 신궁을 참배했던 의도를 더욱 공고히 했다는 목소리가 높다. 일본왕실이 이곳에서 조상신에 대한 제사를 지내고 있기 때문에 이세 신궁은 메이지 신궁 탄생의 근원이기도 하다.

김민규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두 번의 신궁 방문은 결국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위한 담금질”이라며 “일본의 전통 종교인 ‘신도(神道)’에 입각한 신궁 참배는 헌법상 정교분리의 원칙에 엄연히 위배되는 행위”라고 지적했다.

◆ 케리와 헤이글은 왜 야스쿠니 옆 전몰자 묘원을 방문했나

이미 아베 총리는 올해 초 메이지 신궁 참배 후 “야스쿠니 신사도 참배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밝힌 바 있다. 야스쿠니 신사는 태평양 전쟁을 주도한 A급 전범의 명부가 합사돼 있다. 특히 다른 신사에는 없는 경내 시설물 ‘유슈칸’은 평화박물관으로 위장한 채, 침략전쟁을 미화하고 있다. 이는 유슈칸이라는 이름에서도 나타난다. 유취(遊就)라는 말은 순자(荀子) 권학(勸學)편에 나오는 ‘군자는 반드시 환경이 훌륭한 곳을 택하여, 고귀한 인물과 접해 배운다’에서 유래했다. 즉 나라를 위해 귀한 목숨을 바친 영령의 유덕을 널리 알려 배우고자 하는 염원이 담겼다는 것. 그렇다면 일본은 전범들의 행위를 유덕이라고 여기는 것일까.

야스쿠니 신사가 일본의 역사 인식 퇴행의 상징물이 됐음에도, 아베 총리는 지난여름, 야스쿠니 신사를 미국의 ‘알링턴 국립묘지’에 해당한다고 공언까지 했다. 또 지난 17일부터 20일까지 진행된 야스쿠니 신사 추계예대제 기간에는 공물을 봉납했다. 한국과 중국을 의식해 참배 대신 공물 봉납으로 냉각 분위기를 완화했다는 평이 있다. 하지만 공물을 봉납하고 예물 값을 대납한 것은 사실상 참배를 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목소리도 높다.

이달 3일 미·일 외교·국방장관 연석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일본을 찾은 존 케리 미 국무장관과 척 헤이글 국방장관은 비종교적 국립 추도시설인 지도리가후치(千鳥ケ淵) 전몰자 묘원을 방문했다. 그들이 야스쿠니 신사 바로 옆 이 묘원에 헌화한 의미를 아베 총리는 잘 헤아려야 할 것이다. 이는 일본 정치권에 보내는 ‘무언의 경고’다.

도쿄·이세 = 글·사진 박동미 기자 pdm@munhwa.com

이미지 크게보기 이달 2일 아베 신조 총리가 전통행사에 참석해 논란이 된 미에현 이세 신궁. 지난 24일 비가 오는 궂은 날씨에도 신궁엔 참배객들이 가득했다. 특히, 올해는 20년 만에 한 번씩 신체를 옮기는 시키넨센구를 거행해 전 국민적인 관심을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