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연극 ‘새’는 무대에 깔려 있는 나무판을 여러 각도로 조정함으로써 평지와 산, 성벽을 절묘하게 표현한다. 80도에 가깝게 선 나무판 무대를 배경으로 연기를 펼치고 있는 출연배우들. 국립극단 제공

‘현실을 떠나 허공에 세운 유토피아를 비웃다.’ 기발한 무대장치와 풍자 가득한 대사로 ‘사상누각의 낙원’을 마음껏 조롱하는 연극이 무대에 올랐다.

지난 22일부터 11월 3일까지 서울 용산구 서계동 국립극단 내 백성희장민호극장에서 공연하는 연극 ‘새’(사진)다. 국립극단이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아리스토파네스 희극 3부작’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으로 전작 ‘개구리’와 ‘구름’에 이어 관객들의 열띤 호응을 받고 있다. 시리즈의 피날레 작품에 걸맞게 화룡점정(畵龍點睛)격이라 할 만큼 뛰어난 무대를 보여준다.

고대 그리스 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기원전 445∼기원전 385년으로 추정) 원작의 ‘새’를 바탕으로 원로 극작가 윤조병 씨가 극본을 썼다.

또 아들인 윤시중 씨가 연출을 맡아 부자(父子) 간 힘을 합친 작품이 됐다. 특히 윤시중 연출은 전작 ‘파리대왕’ ‘천하제일 남가이’ 등에서 보여준 탁월한 무대활용 기술을 이번 ‘새’에서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무대에 깔려 있는 나무판이 기울기를 달리하면서 평지와 산, 성으로 ‘둔갑’하는, 절묘한 장면을 연출한다.

연극 ‘새’의 줄거리는 이렇다. 시끄럽고 정신없는 현실을 벗어나 평화롭고 살기 좋은 나라를 찾으러 떠난 ‘피스’와 ‘에우’는 오디새를 찾아가 그런 곳을 본 적이 있는지 물어본다.

그러나 그런 나라는 없다는 말을 듣고, 피스와 에우는 새의 영역에 도시를 만들어 함께 살겠다고 한다. 새의 영역, 즉 인간과 신의 중간 지대에 나라를 세우겠다며 새들을 유혹한 것이다. 그들은 인간이 신들에게 바치는 제물을 중간에서 가로채고, 통행료를 받아 인간과 신들을 지배하겠다는 원대한 계획을 세운다.

피스와 에우의 감언이설에 넘어간 새들은 그들이 시키는 대로 허공에 성벽을 건축하고 신들과 인간들을 향해 선전포고를 한다. 새의 나라가 건국됐다는 소식을 듣고 인간들이 찾아온다.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는 감찰관이 새의 나라를 방문하지만 왕이 된 피스는 그를 구덩이에 묻어버린다. 점점 새를 숭배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급기야 불효자와 변호사까지 새의 나라를 찾기에 이른다.

이어 굶주린 신들을 대신해 프로메테우스가 찾아와 피스에게 신들과 협상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마침내 신들의 사절단으로 포세이돈과 헤라클레스, 트리발로스가 새의 나라에 오고, 피스는 그들을 위한 만찬을 준비한다. 피스는 프로메테우스가 가르쳐 준 대로 사절단에게 제우스의 왕권을 넘길 것과 제우스 아들을 자신의 신랑으로 보낼 것을 요구한다. 점입가경으로 흐르는 피스의 행태는 어디까지 진행될 수 있을까.

결국, 연극 ‘새’는 허공에 세운 유토피아의 허망함을 이야기하고 있다. 특히 2500년 전의 그리스 희극을 오늘날 한국사회에서도 통용될 수 있도록 적절히 재창작한 극본의 힘이 돋보인다. 인간의 탐욕과 교만이 새의 영역에까지 파고들어 새들의 나라가 점점 인간의 나라로 변색돼 가는 과정을 여실히 보여준다.

아울러 우리가 꿈꾸고 있는 이상향이 현실에 뿌리를 두지 않는 한 그야말로 사상누각에 불과함을 통렬하게 풍자하고 있다.

세속에 물든 인간과 자유로운 새, 절대 권력의 신들이 벌이는 왁자지껄한 한 판의 소동 속에서 관객들은 언뜻언뜻 드러나는 인간과 사회, 국가의 민얼굴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80도 가까이 기우는 나무판 무대에서 절묘하게 연기를 펼치는 출연배우들의 투혼에 절로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으리라. 박성연·임세운·최병준·윤서정·정혜선·김남수·문숙경·한일규 등 출연. 1688-5966

김영번 기자 zerokim@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