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기생충 열전 / 서민 지음 / 을유문화사

이첨지:얘기 중에 미안하네만, 입에서 물컹 씹히는 게 회충이 있는 것 같네. 좀 빼고 얘기하세.

박첨지:허허. 그 녀석이 세상 구경이 하고 싶었나 보네. 그리 하게.

‘착하거나, 나쁘거나, 이상하거나’라는 부제가 달린 이 책에 등장하는 구절이다.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엽기적인 대화다. 그러나 20세기 중반에만 해도 그런 일이 흔치는 않아도 가끔씩 벌어졌다. 1948년 우리나라 사람 중 몸 안에 회충 알을 갖고 있는 비율은 82.8%였고, 회충 감염량은 5억~10억 마리로 추산됐다. 당시 인구가 2000만 정도였으니 1인당 배 속에 25~50마리씩 회충을 키우며 살았던 셈이다.

보릿고개가 기승을 부리던 시절에 회충은 ‘인간의 몸에 기생해 영양분을 갈취하며 사는’ 기생충의 대명사였다. 그러니 우리나라에서 기생충을 무조건 박멸 대상쯤으로 본 것도 무리가 아니다. 이 책은 어찌 보면 기생충에 대한 그 같은 편협한 생각에 일침을 가하고 있다.

책에는 회충이나 편충, 간디스토마 등 모두 20종의 기생충이 소개돼 있다. 그러나 책을 읽다보면 기생충에 대한 ‘보건학적 지식’ 이상의 내용을 담으려고 애쓴 필자의 노력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특히 기생충과 면역계에 대한 최근의 연구성과는 자못 충격적이다. 즉 인간의 면역계와 기생충은 오랜기간 긴장관계를 유지하며 공존공생해 왔는데 최근 구충약의 발달로 기생충이 사라지게 됐고, 이로 인해 파트너를 상실한 면역계가 우리 몸을 공격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그 결과로 기생충이 없어진 나라에서 알레르기 같은 자가면역질환이 눈에 띄게 늘고 있다고 운을 뗀 뒤 대장 질환으로 고통받는 크론씨병 환자에게 돼지편충을 먹였더니 72%의 환자가 완치 판정을 받았다는 결과도 공개하고 있다.

또 근육 조직속에 똬리를 틀고 사는 메디나충 얘기는 얼마전 개봉된 영화 ‘연가시’를 방불케 할 정도로 흥미진진하다. 그러면서 의학의 신인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에 뱀 한 마리가 감겨 있는 장면을 소개하며, 이 뱀은 메디나충이고 지팡이는 메디나충을 (몸에서) 둘둘 말아 빼내는 광경일 수도 있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이 책이 인문학적 교양서의 자격도 어느 정도 갖췄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대목이다.

기생충에 대한 대중서가 드문 요즘(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이 책 포함 모두 다섯 권) 저자가 의대에서 남들이 기피하는 기생충학과를 선택해 20여년 연구에 매달려온 후 내놓은 이 책은 분명 소중한 결과물이다.

그래서 더욱 “기생충은 아직 멸종하지 않았고, 파리나 모기, 바퀴벌레가 그런 것처럼 인간보다 더 오래 지구에 살아남을 존재들”이라며 “이 책이 그간 대중과의 소통에 관심이 없던 다른 기생충 학자를 자극시켜 더 많은 기생충 대중서가 출간될 수 있기를 원한다”는 필자의 바람이 절실하게 다가온다.

이경택 기자 ktlee@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