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허동현(왼쪽) 경희대 한국현대사연구원장과 강규형 명지대 기록정보과학전문대학원 교수가 지난 3일 서울 중구 충정로 1가 문화일보 사옥에서 현행 역사교육의 문제점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있다. 김동훈 기자 dhk@munhwa.com

문화일보는 최근에 다시 이슈가 되고 있는 ‘역사 전쟁(논쟁)’과 관련, 역사전문가들의 견해를 듣는 좌담을 마련했다. 지난 3일 서울 중구 충정로 1가 문화일보 사옥에서 열린 좌담에는 허동현(53) 경희대 한국현대사연구원장(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과 강규형(49) 명지대 기록정보과학전문대학원 교수가 참석했다. 개화기를 전공한 허 교수는 한국 근대사 연구자로서는 보기 드물게 한국사학계 주류의 시각에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해 온 연구자다. 미국에서 역사학으로 석·박사 학위를 받은 강 교수 역시 보수주의 역사단체인 한국현대사학회의 대외협력이사 등을 맡아 ‘한국근·현대사’등 기존 검인정 역사교과서에 대해 날을 세워 왔다.

대담 : 허동현 경희대 한국현대사연구원장, 강규형 명지대 기록정보과학전문대학원 교수

―지난 2008년 금성출판사의 ‘한국근·현대사’ 교과서 수정 논란이 한국사회를 달군 이후 올해 다시 역사교과서와 역사교육 문제가 뜨거운 감자다.

강규형 교수(이하 강) = 지난해 10월 18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공개된 역사 다큐멘터리 ‘백년전쟁’ 본편과 번외편 각 1부가 기름을 부은 격이 됐다. 대선에 영향을 주기 위한 목적으로 제작된 이 다큐에 한국사학계 주류의 논리가 거칠게 표현돼 있는데, 이 논리에 허점이 많아 논쟁이 격화될 수 밖에 없었다. 올해는 마침 새로운 검인정 ‘한국사’ 교과서가 나오는 해가 아닌가. 시기적으로도 다시 논쟁이 재점화할 가능성이 높은 해였다.

허동현 교수(이하 허) = 2002년 검인정 교과서(‘한국근·현대사’)가 처음 나왔으며 그 전까지는 국정교과서 체제였다. 검인정 체제로 바뀌면서 교과서의 집필권이 이른바 시민사회로 돌아왔지만, 검인정 교과서에 담긴 역사 인식틀이 종래의 전통 사관을 전복하는 수정주의 사관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게 문제다. 다문화 시민사회에 걸맞은 다양한 가치 등을 반영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검인정 제도는 이상적이지만, 한국사학계가 근현대사를 연구한 지 얼마 안 되는 현실에서 드러난 결과물들은 수정주의와 등 편향된 사관에 기초할 수밖에 없었다.

―수정주의·통일지상주의 사관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허 = 미국의 좌파 지성들이 자국의 대외정책을 제국주의라고 비판하며 만든 게 수정주의 사관이다. 이 사관에 입각해 보면 베트남전쟁 당시 미국은 제국주의 패권 정책을 펼쳐 정당한 민족해방 세력인 호찌민 공산정권의 노력을 좌절시키려 했다. 이보다 앞서 일어난 6·25전쟁도 베트남전쟁의 원형이 되면서 마찬가지 등식이 성립된다. 대한민국은 태어나서는 안 될 정부이며 대한민국 건국세력은 친일파이고 미국의 괴뢰세력이 되는 것이다. 이와 함께 민족 단위에 기초한 남북한이 통일된 나라가 돼야 하고 역사가 이를 위해 복무해야 한다는 통일지상주의 사관에 입각해 서술하다 보니 대한민국의 역사는 없어져 버렸다.

강 = 1980년대 초 대학에 진학해 사학과를 다녔는데, 당시에는 한국사 수업에서 근현대사를 거의 가르치지 않았다. 특히 현대사의 경우, 역사의 대상이 아니라는 고루한 생각이 만연해 연구와 교육이 이뤄지지 않았다. 한국사학계에서 현대사를 전공한 박사가 배출된 것도 1990년대 초반의 일이다. 동·서양사나 정치학, 경제학 등 인접 학문 분야에선 한국사학계보다 오히려 일찍 현대사 연구와 교육이 시작됐는데, 근현대사 교육 문제가 거론되자 한국사학계가 어느 날 갑자기 현대사에 대한 독점권을 주장하면서 내놓은 게 바로 수정주의 사관이다.

허 = 사실 수정주의 사관은 미국사회의 건강성을 지켜주는 역할을 한 측면이 있다. 하지만 남의 눈을 빌려 우리 역사를 보면서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훼손시키는 역사 인식을 초래했다. 무엇보다 냉전이 해체된 뒤 공산권의 새로운 사료들이 공개되면서 옛 소련이 미국보다 더 제국주의적 정책을 취한 사실이나 이오시프 스탈린과 마오쩌둥(毛澤東) 치하에서 발생한 대량 학살 등이 밝혀졌다. 브루스 커밍스와 함께 수정주의 사관에 입각해 한국사를 서술했던 존 할리데이 같은 서구 지성들은 자신의 잘못에 대해 고백했지만, 한국에서는 양심선언 없이 수정주의 사관에 입각한 인식이 전복되지 않고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강 = 새마을 운동은 매우 폄하를 하면서 북한의 천리마 운동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거나 상당히 성공적인 토지개혁이었던 대한민국의 농지개혁은 삽화까지 동원해 부정적으로 그리는 반면, 실패로 끝난 북한의 토지개혁에 대해 긍정적인 서술을 한 게 과거 ‘한국근·현대사’ 교과서 일부에서 보였다. 서구에서는 1960년대 수정주의가 나왔는데, 한국에서는 격변기인 1980년대 한국판 수정주의가 뿌리를 내렸으며, 이후 386 세대가 기성세대가 되면서 한국판 수정주의가 우리 사회의 본류가 됐다. 한반도는 앞으로 자유통일이 될 게 확실한데, 지금 한국사학계의 논리로 보면 이는 아주 부정적이고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 된다. 한국사학계의 통일지상주의가 자유민주주의에 의한 통일을 탐탁지 않게 여기게 하는 딜레마를 낳은 셈이다.

―기존 역사교과서들이 문제점이 많나.

허 =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서술 지침에 ‘2차 세계대전 이전 전체주의의 대두에 대해 쓰고 이를 비판하라’고 돼 있다. 하지만 교과서를 보면 아돌프 히틀러 등 백색(白色) 전체주의만 비판을 했지, 적색(赤色) 전체주의에 대한 비난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적색 전체주의 시절에 빚어졌던 대량학살, 심지어 평화시기 7500만 명 이상이 희생된 중국의 대약진운동이나 문화대혁명 같은 것은 자본주의 사회의 대안모델로 서술돼 있기도 하다. 냉전 붕괴 이후 한국 지식인 사회의 시계, 특히 한국사학계의 시계가 멈춰서 있어 새로운 자료의 발굴은 물론, 신냉전사의 연구성과 등을 수용하지 못하고 있다.

강 = 물론, 한국사 교과서가 모두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두산출판사의 ‘한국근·현대사’와 지학사의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처럼 최신 연구결과를 업데이트하고 비교적 균형있게 서술한 사례도 있지만, 문제는 이들 교과서의 채택률이 낮다는 것이다. 이는 일선 역사교육 현장에 큰 문제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국사 수능 필수화 등 역사교육 강화 방안이 우리 사회의 이슈로 부상하고 있다.

강 = 한국사 필수에 이어 한국사 과목의 수능 필수화까지 거론되고 있다. 나는 역설적으로 말해 이명박정부가 한국사를 필수로 한 게 실수라고 생각한다. 갑자기 한국사를 필수화 하면서 교과서 논란이 있자 황급하게 무리를 해 가며 교과서를 바꿨는데, 이는 잘못한 것이다. 아이들이 배고프면 먹어야 하지만, 상한 음식을 먹으면 애들이 아프고 죽을 수도 있다. 한국사 수능 필수화는 언젠가는 해야겠지만, 지금은 때가 너무 안 좋다고 본다.

허 = 같은 생각이다. 한국사 교과서가 검인정이 되려면 학계에서 한국사 연구가 많이 성숙돼 있고 다양한 논쟁과 이를 통해 통일화된 내용이 축적돼 있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처럼 설익은 얘기들만 범람하는 상황에서 낡고 오래된 얘기로 검인정 교과서를 만드는 것은 난센스다. 현 단계에서는 차선책이지만, 소모적인 논쟁을 벗어나기 위해 다시 국정교과서로 돌아가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와 함께, 교과서 집필에 고등학교 교사들이 많이 참여하고 있는 것도 시정이 필요하며 역사 교사들의 재교육도 절실한 과제다.

강 = 역사 교사 재교육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다. 하지만 국정교과서를 다시 부활하기보다는 검인정 교과서 제도가 성숙한 방향으로 가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는 역사교과서가 논란도 많지만 조금씩 꾸준히 개선되고 있다고 느낀다.

허 = 우리 사회에서 오랜 기간 역사교과서를 놓고 전쟁 내지 논쟁이 벌어져 왔지만, 정작 한국사를 수능 필수로 한 서울대 지망생들을 뺀 학생들은 배우지 않는다. 특히 이공계 진학생들은 역사가 아니라 사회과 과목 자체를 안 들어 역사 문맹 현상이 심하게 진행되고 있다. 한국사는 필수가 됐지만 근현대 비중은 축소됐다. 기억을 둘러싼 충돌이 벌어지고 있으니 줄이는 게 어떻게 보면 해결책이 될 수도 있지만 말이다.

진행·정리 = 이재동 기자 trigger@munhwa.com


◆허동현(53) 경희대 한국현대사연구원장 ▲고려대 대학원 사학과 박사(1994년)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한국민족운동사학회 편집위원장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위원 ▲국사편찬위원회 위원

◆강규형(49) 명지대 기록정보과학전문대학원 교수 ▲미국 오하이오대학원 박사(역사학·1998년) ▲연세대 통일연구원 연구교수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위원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운영 자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