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장경섭(52)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서울대 사회학과 졸업 ▲미국 브라운대 대학원 석·박사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보건복지부 사회복지정책심의위원 ▲한국일보 논설위원 ▲현대중국학회장 ▲국가청소년위원회 청소년미래전략자문위원

세상이 각박해졌다는 말은 이제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 술자리에서 늘어놓는 한탄이 아닌 현실의 문제가 됐다. ‘이웃’은 사회를 구성하는 바탕이자 끈끈한 정을 상징하는 말이었고 먹고 살기 어려웠던 시절에도 좋은 이웃은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그러나 더 이상 이웃이란 이름으로 훈훈한 정을 나누는 사람들의 모습은 기대하기 어려워졌다. 지난 7일 서울 중구 충정로 문화일보사 회의실에서 열린 대담에 참석한 신광영(이하 사회학) 중앙대 교수와 장경섭 서울대 교수는 “대규모 인구가 도시로 이동하면서 전통적 공동체, 마을이라는 사회적 관계들이 깨졌다”며 “신자유주의에 내재된 사회 파괴적·해체적 경향들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웃 간 범죄를 비롯한 극단적 갈등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최근의 이런 사회적 분위기나 현상에 대해 진단해 달라.

▲신광영 교수(이하 신 교수) = 일단 짧게는 한국 사회의 외환위기 이후 변화이고 길게는 산업화·도시화 등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경제성장을 통한 산업화 과정에서 양적인 차원에서는 외국에서도 인정하는 것처럼 큰 변화를 만들어냈고 그 자체가 하나의 성과처럼 인식되고 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경제 이 외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도시화가 이뤄지고 대규모 인구가 도시로 이동하면서 전통적 공동체인 마을이 깨져 버렸다. 이후 많은 사람들이 아파트 같은 공동주택에서 생활하는데 벽과 층을 경계로 불과 2∼3m 떨어져 자고 있다. 공간적으로 그렇게 가까운 적이 없었다. 하지만 심리적·정서적으로는 위아래나 옆집도 모르는 고립된 삶을 살고 있다. 비교의 척도가 되는 것은 주로 경제적 측면, 자동차나 주택의 크기다. 상대적으로 빈곤하거나 어려움을 겪는 집단에서는 어디 하소연할 데가 없는 거다.

▲장경섭 교수(이하 장 교수) = 다른 한편으로 사회학적 차원에서 결국 신자유주의 문제를 말씀드려야 할 것 같다. 한국은 개발 체제의 모순점을 여러 가지 가지고 있어 변질되고 붕괴하는 과정에서 파행적인 문제들이 발생하는데 거기에 신자유주의적인 흐름들이 가세하다 보니 사회파괴적·해체적 경향들이 함께 진행되고 있는 것 같다. 한국은 인구의 80%가 농촌에, 나머지가 도시에 살다 짧은 기간에 그 비율이 완전히 역전됐다. 취업과 교육 등 경제적 목적으로 사람들이 도시로 오는데 그 과정에서 하나의 사회로서 어떻게 도시화가 형성돼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 없이 주먹구구식으로 이뤄지다 보니 사회가 혼란스럽고 엉망일 수밖에 없다.

―공동체 붕괴 문제를 사회 발전 과정에 필수적으로 겪어야 하는 성장통으로 봐야 하나. 선제적 대응으로 피해 갈 수 있는 방법은 없나.

▲신 교수 = 경제성장이란 물질적 가치를 중시하는 토대 위에서 이뤄진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런데 경제성장의 결과로 성장의 역설이라고 할까. 인간의 가치나 관계가 아니라 물질적인 획득, 그리고 성과 이런 것으로 각 개인들의 사회적 가치를 판단하게 됐다. 이 같은 성공의 역설이 현재 한국 사회에 존재하고 그 과정에서 결국 공동체가 해체되고 남은 것은 가족밖에 없다. 이 때문에 사회적인 것, 공론성에 대한 인식이 굉장히 낮다. 거기서 발생하는 여러 심각한 문제들이 분노, 혐오 범죄, 불특정 다수 대상 범죄를 일으키고 있다.

▲장 교수 = 다만 이런 상황에서도 사회나 사람들이 사회성이 없는 것은 아니고 요즘은 연고적인 차원에서 공동체를 형성한다. 예를 들어 같은 고향에서 올라온 사람이거나 학교를 같이 나오거나, 고시를 같이 하거나 등의 연고 공동체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이 같은 연고적 공동체들이 사회 전체로 봤을 때는 통합보다 오히려 대립을 야기하고 그런 것들 때문에 사회적 적대감이 만연해 있다.

―층간 소음이나 주차 시비 등으로 사람을 죽이고 고독사한 노인의 시신이 몇 달 뒤에 발견되는 등 전에는 이웃이나 마을에서 처리할 수 있는 문제들이 공공 분야에서 개입해 해결해야 하는 수준까지 왔다. 현 상황이 사회가 흘러가는 흐름 속에서 나타나는 필연적 현상인가.

▲신 교수 = 내가 판단할 때는 분명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다. 한국 사회가 사회 해체의 여러 징후들을 보여주고 있는 거다. 자생적이고 자율적이고 유기적인 존재로서의 사회가 지금 여러 차원에서 허물어지고 있는 해체적인 상황들이다. 그래서 자살률, 특히 노인 자살률 같은 경우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다른 나라에 비해 높은 수준이다. 결국 사회가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원자화된 개인들이 자기 이익이나 가족에만 관심을 갖고 이웃이나 타인들에게 관심을 갖지 않아 고독사 문제도 발생하고 그 과정에서 가족도 해체되고 있다. 이런 현상들은 한국 사회가 계속 사회로서 존재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생각해야 할 정도로 심각한 사회 해체적인 징후라고 볼 수 있다.

▲장 교수 = 사실 최근 여러 가지 사회 해체 징후가 나타나고 있는데 처음부터 단추가 잘못 끼워졌기 때문에 발생한 측면들이 있다. 신 교수 말씀대로 가족이 중요한데 사회는 엉망인 채 비어 있고 가족 중심의 유대, 자녀들에 대해 교육 투자를 한다든지 보호적 의미에서 가족에 대한 의존 관계는 굉장히 강하다. 부모들이 자녀들을 대학원까지 책임지는 상황이다 보니 원래 가족주의자가 아니더라도 투자해 놓고 나면 남은 게 자식밖에 없으니 가족주의자가 돼야 자신의 인생을 정당화시킬 수 있는 상황이다. 노인 입장에서는 자녀들에게 다 투자하고 빈껍데기만 남았는데 가족 부양 체제를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보니 사회나 국가 차원에서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상황까지 온 거다.

―공동체가 붕괴되는 현 상황에서 문제 해결을 담당해야 할 주체는 어디라고 보는가.

▲신 교수 = 리더십, 정치적 리더들의 역할이 상당히 중요하지만 ‘국가가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는 환상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새로운 정치 개념으로 ‘생활정치’라는 게 언급된다. 시민들이 참여하고 체감할 수 있는 교육, 주택, 환경 등의 이슈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받아들이자는 개념이다. 생활정치라는 용어는 오래전에 등장했지만 이게 한국 정치의 의사 결정 과정에 중요한 요소로 기능하고 있진 않다. 시민사회의 요구로 국가가 이뤄지고, 국가에서 이뤄지는 행정이나 정책이 시민 참여와 감시에 의해 투명해짐으로써 국가와 시민사회가 상호 보완적이고 상생의 관계가 돼야 하는데 상당 부분 국가는 국가대로, 시민사회는 비판하거나 저항하거나 갈등하는 관계로 오랜 기간 지속됐다. 광화문, 대한문 앞에서 여러 갈등 관계가 표출되는 것도 그런 차원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장 교수 = 최근 개인 기부가 줄어드는 것은 외환위기 이후 중산층이 줄어든 것도 한 이유다. 다른 한편으로는 전반적으로 외환위기와 상관 없이 기부라는 것이 시민사회 문화로 정착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아는 사람들의 경조사에는 얼마나 돈을 많이 쓰나. 이건 또 다른 종류의 기부인데 우리 사회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거다. 우리에게 아직 공동체의 한계가 아는 사람, 학연, 지연 등 연고적 관계를 넘어 현대적 관계를 기반으로 한 시민성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로비라는 것도 연고 관계를 통해 이뤄지고, 일자리도 그렇게 얻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기부 문화 자체도 사실 연고 관계에 있지 않은 사람들과 어떻게 상생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근대화 과정이 필요하다.

―공동체 붕괴 등의 사회 현실을 만들어낸 배경에 경제적인 측면 외에 정치·사회적인 부분은 영향이 없었나.

▲장 교수 = 서구의 경우 자유주의 시민사회를 바탕으로 민주주의가 만들어졌다. 반면 우리는 역사적 맥락에서 광복 후 국가 중심의 근대화를 진행하고 그 과정에서 시민사회 기반 없이 민주주의를 도입했다. 시민사회 기반이 부실하다 보니 민주주의가 흔들리고, 민주주의 제도가 먼저 만들어진 뒤 시민사회도 제대로 형성해야 하는 식으로 역사적인 순서가 서구와 반대되는 문명적 역설이 있다.

▲신 교수 = 민주주의를 체험하지 못하고 민주주의를 제대로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해야 한다는 역설이다.

―경제·정치·시민사회적 맥락에서 모두 공동체 붕괴를 야기했다고 볼 수 있다면 총체적 난국 아닌가.

▲장 교수 = 막연히 공동체 의식이나 시민적 소양 같은 것이 없는 현실을 개탄하는 방식으로 접근할 일은 아니다. 역사적 맥락에서 보면 가장 중요하고, 미뤄진 하나의 숙제를 해결한다고 보고 문제 해결에 나서야 한다.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고 우리 사회를 새롭게 만들어 나가야 하는 차원의 문제다. 사회 병리적 현상으로 보기보다 폭넓게 근본적으로 접근하고 장기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다.

▲신 교수 = 공동체 붕괴 등의 문제가 곧바로 해결될 것으로 기대하지는 않는다. 사실 10∼20년의 장기적 변화 과정을 통해야 해결될 수 있는 이슈들이 많다. 중요한 부분은 이런 문제 제기를 통해 시민들도 자기 교육을 하고 정치인들도 자신이 추진하는 정책의 의미가 어떤 것이며, 한국 사회가 어떻게 변해 가야 하고, 어떤 접근이나 태도가 필요한지에 대한 자기학습이 필요하다. 자기성찰적이라 할 수 있는 과정이다.

―역설적으로 사회가 제도화되고 시스템화되면서 어떻게 보면 구성원들이 각자 자기 역할만 충실히 해도 살 수 있는데 과연 공동체라는 가치가 계속 유효한가.

▲신 교수 = 한국 사회는 공동체 의식에 의해 지탱된다. 만약 공동체 의식이 없다면 국방의 의무도 다할 이유가 없다. 국방은 공동체 전체를 지키기 위한 것이다. 공동체 의식이 사라지고 모두 개인중심적 사고를 하게 된다면 용병을 써서 국방을 유지해야 한다. 극단적으로 원자화된 사회에서는 민족도, 국가도, 사회도 없고 자신만 남게 되는 거다. 그런 차원에서 과거의 농촌 공동체가 아니라도 최소한 그 지역 주민들이나 사회 구성원들이 다른 구성원을 존중하고 자신도 존중받아야 한다. 공동체 의식이 불필요하거나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면 국가나 사회도 다 불필요한 것이 될 수 있다.

▲장 교수 = 예컨대 아파트에 살고 있다면 그 지역의 관계는 시장이 정해 준다. 가진 돈이 이 정도니까 그 아파트에 산다는 셈이 된다. 사회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측면이 결여된 삶을 살면서 상징적으로 아파트 시세 담합을 위해 한 번씩 뭉치면서 공동체 운운한다는 얘기다. 만약 그것이 자기 정체성을 구성하는 것이라면 한국 사람들의 수준이라는 게 개탄스럽기 그지없는 거다. 이걸 넘어서 하나의 공동체적 존재성을 갖게 되려면 사회 전체의 공동체성이나 다층적 차원에서의 시민성과 연결시켜 장기적으로 고민해야 할 것 같다. 물론 옛날식으로 국가에서 시민 교육을 할 수는 없다. 한국은 발전한 사회이고 곳곳에 수준 높은 시민사회도 형성돼 있는 게 사실이다. 무엇을, 어떤 가치를 추구하고 발전을 추구할 것인가 하는 기본적인 문제에 대한 공감대를 마련하는 것이 공동체 논의의 첫걸음이다.

진행 = 박준희 기자 vinkey@munhwa.com

정리 = 이후연 기자, 사진 = 심만수 기자

이미지 크게보기신광영(59)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서울대 사회학과 졸업 ▲미국 미네소타대 대학원 석사·위스콘신대 대학원 박사 ▲한림대 사회학과 교수·사회과학연구소장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학생지원처장 ▲국가청렴위원회 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