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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서양이 지배하는가 / 이언 모리스 지음, 최파일 옮김 / 글항아리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의 시대가 가고 세계 초강대국 중국이 주도하는 ‘팍스 시니카(Pax Sinica)’의 시대가 열릴까. 과연 500년간 세계를 이끌어온 서양의 시대가 지고, 아시아가 세계의 패권을 잡게 될 것인지를 놓고 학자들 간에 논쟁이 불붙고 있다. 량치차오(梁啓超)는 1902년에 쓴 중국지리대세론에서 “중국의 큰 강은 모두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른다”고 했다. 세계의 대세도 서양에서 동양으로, 서풍에서 동풍으로 바뀔 것인가 오래 살아서 지켜보고 싶다. 저자는 그 시점을 멀리 잡고 있다. 동양의 시대는 2103년이 돼야 열릴 것이라고 내다본다.

책은 눈이 휘둥그레지는 픽션으로 시작한다. 1848년 영국이 청 제국의 속국으로 편입되면서 빅토리아 대왕의 남편 앨버트 공이 베이징으로 끌려가는 장면이 그것이다. 앨버트 공은 중국에서 여생을 보낸다. 자금성에 머물게 된 앨버트 공은 영국식 옷을 벗어던지고 변발을 길렀다. 빅토리아 여왕은 난방이 잘 안 되는 싸늘한 버킹엄 궁전의 내실에서 세상과 접촉을 끊는다. ‘중국 제국 이전 시대’의 마지막 유물이 돼 쓸쓸이 숨을 거둔다. 물론 실제 역사는 정반대다. 아편전쟁에서 영국에 패한 중국은 ‘종이호랑이’로 전락한다. 영국군 장교들이 베이징의 궁전에서 약탈한 강아지를 빅토리아 여왕에게 선물한다. 여왕은 그에게 루티(전리품)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왜 세상의 중심은 중국이라는 대동사상(大東思想)은 물거품이 되고 중국은 영국에 무릎을 꿇었는가.

책은 오늘날 서양이 세계를 지배하게 된 원인이 무엇인지를 규명하기 위해 동양과 서양에서 각각 전개돼온 문명을 폭넓은 시야로 파헤쳤다. 동양과 서양이라는 구분이 의미가 없었던 유인원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서양이 세계를 지배하게 된 뿌리를 분석한다.

저자가 고안해 분석의 틀로 삼은 것은 생물학, 사회학, 지리학, 문명발전 수준 등을 수치로 환산한 ‘사회발전지수’다. ‘사회발전지수’는 문명 간의 흥망성쇠를 명료하게 드러내 보이며, 재치 있는 문장과 명쾌한 논증은 이 방대한 문명사에 흥미진진한 내러티브를 부여한다. 저자는 오늘날 서양의 지배는 지리가 결정했으며, 22세기는 동양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예측한다. 지금까지 출간된 통사 가운데 이렇게 대담한 주장과 빈틈없는 연구조사가 결합된 책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사회발전 수준이 바뀌면 사회발전이 요구하는 자원도 변하게 마련이다. 어떤 문명이든 일정한 시점에 다다르면 혁신적 변화로만 돌파할 수 없는 단단한 천장이 형성된다는 것. 이 천장을 부수고 솟아오르지 못하면 그 사회는 정체되거나 붕괴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로마제국과 중국 송나라가 몰락한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다.

반면 한때 중요하지 않았던 지역들이 자신의 미진했던 부분에서 오히려 유리한 요소를 찾아낼 수도 있다. 이것이 저자가 말하는 ‘후진성의 이점’이다. 먼저 아랍 지역의 예를 보면, 7∼8세기 페르시아와 비잔티움 사이에 거대한 전쟁이 벌어지면서 서양 핵심부에 위치한 제국에 위기를 초래했다. 당시 붕괴하는 제국의 주변부에서는 이슬람교가 지속적인 전쟁 상태를 거치면서 숨가쁜 성장을 이어가고 있었다. 무슬림은 그들의 후진성에서 이점을 발견했다. 바로 종교적 구원과 군사주의의 결합이었다. 조직도 목적도 없었던 세상에서 그들은 이질적으로 보이는 이들 요소의 결합을 통해 세력을 확장했다. 1세기 만에 서양 핵심부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을 집어삼키게 됐다. 1529년 술탄 술레이만은 빈 바깥에 진을 쳤다. 그는 도시를 함락할 수 없었지만 이 포위전은 오스만 제국이 곧 유럽전체를 집어삼킬 것이라는 공포로 몰아넣었다. 유럽 대륙이 서부에 단일한 제국을 건설하려고 시도했으나 이뤄지지 못했다. 2세기가 더 흘러 다른 서유럽인(영국)은 세계를 탈바꿈시킬 산업혁명에 시동을 걸었다.

근대 동양과 서양의 운명을 가른 분수령 중 하나인 아메리카의 발견 역시 지리적 요인 때문이었다. 아메리카를 발견하고, 정복하고 약탈한 서양은 이곳에서 흘러들어온 막대한 부를 바탕으로 산업혁명을 일으켰고, 결국 세계 패권을 거머쥘 수 있었다. 책에 따르면 옛 서양 핵심부는 현재 1인당 에너지 획득, 기술, 군사적 능력에서 커다란 우위를 지니고 있고 이번 세기 전반기 내내 어떤 형태로든 지배를 유지할 것이 확실하다. 그렇지만 발전의 역설과 후진성의 이점은 21세기에도 작동하고 있다. 저자는 2103년쯤 중국 중심의 세계질서가 만들어지는 시점에 인류는 서양의 세계 지배보다 평화로울 것으로 조심스럽게 전망한다. 하지만 불안 요소도 많다. 인류는 하루아침에 전체를 몰락하게 할 원자폭탄과 환경파괴의 위협에 노출돼 있다. 우리의 정신과 기계를 융합하는 정보기술 파워가 희망이다.

예진수 기자 jinye@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