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의도적 눈감기 / 마거릿 헤퍼넌 지음, 김학영 옮김 / 푸른숲

“모른다는 것은 괜찮아요. 무식한 것도 대수로운 일이 아니죠. 안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적어도 안다는 것은 현실이고 진실이죠. 가장 최악은 알고 싶지 않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알고 싶지 않다는 것은 뭔가 아주 나쁜 것이 아니겠어요? 나쁜 게 아니라면 알기 싫을 이유가 없겠죠.”

히틀러의 총애를 받던 건축가로 1942년 이후 나치독일의 막강한 2인자가 됐던 알베르트 슈페어(1905∼1981)의 전기를 쓴 작가 지타 세레니의 말이다. 세레니는 “슈페어는 자신이 보고 싶지 않은 것은 전혀 보지 않았다”며 “실제로 슈페어는 굉장히 재능이 많은 사람이었고, 똑똑했지만 의도적으로 망각하는 것, 그것이 바로 그의 방어수단이었다”고 지적한다.

이 책은 바로 이 같은 ‘의도적 외면’에 대해 심리적·뇌과학적으로 매우 세밀하게 분석하고 있다. 맨 앞에 인용한 세레니의 말이 이 책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나치 전범들에 대한 뉘른베르크 국제재판에서 교수형에 처해지지 않은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던 슈페어는 법정에서 히틀러 정권이 저지른 범행을 기탄없이 고백했다. 그렇다면 슈페어는 그 이전엔 왜 자신이 직접 목격했던 ‘사실’(유대인 학살 등)로부터 눈을 감았던 것일까.

세레니는 슈페어의 도덕적 타락은 히틀러에 대한 감정적 집착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히틀러를 사랑했어요. 히틀러가 독일을 사랑하니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 거죠. 하지만 히틀러의 야망이 틀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마음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이 책의 저자 역시 사랑에 ‘눈이 멀어’ 사실을 외면했다. 선천적으로 심장에 병이 있는 남자를 남편으로 선택했던 것이다. 저자의 고백이다. “마이클과 결혼했을 때, 나는 의도적으로 눈을 감았을까? 물론 그랬다. 모두가 알았듯, 나도 그의 병세를 잘 알았다. 그러나 그와 사랑에 빠졌고 병 따위는 중요치 않았다. 어쨌든 우리는 영원히 함께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저자의 남편은 수차례의 심장 수술 끝에 38세란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떴다.

저자는 우리 뇌를 ‘눈감게’ 하는 요소들로 사랑을 비롯, 동질성·이데올로기·한계·현상유지·복종·순응·거리·보상 등을 꼽는다. 이러한 요소들이 어떻게 ‘의도적 외면’을 만드는지와 그 결과로 어떤 치명적인 사건들이 일어났는지를 풍부한 사례를 통해 보여준다. 그 중 하나를 들어보자. 전세계 경제를 휘청거리게 했던 미국발 글로벌 금융위기는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에서 시작됐다. 저자는 이 사건을 개인과 금융 회사의 입장에서 ‘순응’이라는 키워드로 풀이한다.

“집을 사들이기 시작했어요. 왜냐고요? 음,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게 하고 있었으니까요.” 주변 사람들이 주택 투기로 큰 수익을 얻는 것을 보고선 뒤늦게 투기 대열에 합류했다가 몰락한 이의 말이다. 이렇게 ‘묻지마 투자’에 뛰어든 사람의 수가 점점 늘어났던 것이다. ‘묻지마 투자’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모두가 돈을 벌고 있는데 나만 바보처럼 있을 수 없다는 생각과 나도 그 사람들을 그냥 따라하면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소위 시류에 순응하는 것이다. 개인들이 주택 투기에 뛰어든 것과 마찬가지로 금융 회사들은 자사의 점유율을 높이고 실적을 최대치로 끌어올리기 위해 차례차례 순응이라는 함정에 빠지고 말았다.

그렇다면 인간은 ‘의도적 눈감기’를 조종하는 뇌에 마냥 끌려다니기만 하는 존재인가. 그렇지 않다. 저자는 “죽는 순간까지 우리는 지속적으로 변화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것을 증명한 용기 있는 사람들을 저자는 ‘카산드라’라고 부른다. 그들은 의도적인 눈감기의 길에서 벗어나 진실을 직시한 사람들이다. 한마디로, 권력자의 눈으로 보지 않고, 상처받기 쉬운 사람들의 눈으로 보는 사람들인 것이다.

김영번 기자 zerokim@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