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적도의 남자’(2012. 3. 21 ∼2012. 5. 24 방송. 수·목 20부작) 제작과정 모습. KBS 제공

바닷가 수평선을 배경으로 양복 차림의 엄태웅 얼굴이 클로즈업 되며 바람에 흩날리듯 ‘적도의 남자’ 글씨가 화면에 새겨졌다. 예고편의 여운이 싸했다. ‘1박 2일’ 예능프로그램에서 듬직하고 서글서글한 엄태웅과는 분명 달랐다. 적도라는 뜨거운 이미지만큼 궁금한 드라마였다. 더구나 ‘적도의 남자’는 2012년 3월 21일 방송3사가 동시에 새 수목드라마를 시작하는 레이스의 KBS주자였다. 이런 일도 흔치 않은데, 공교롭게도 3사 편성이 이때 맞물린 것이다. 3월 21일 오후 2시쯤, KBS사내 직원용 게시판에 광고기획부 직원 이름으로 글이 하나 올라왔다. 제목은 “‘적도의 남자’를 응원합니다”.

“우리 KBS 제작 현장의 동료들이 절치부심 심혈을 기울여 선보일 수목드라마 ‘적도의 남자’와 월화드라마 ‘사랑비’가 대박을 터뜨릴 수 있도록 KBS가족들이 십시일반 각자의 위치에서 응원합시다. 요즘 KBS드라마가 고전하고 있습니다. 광고수주에 드라마가 지대한 역할을 합니다. 우선 KBS 직원, 그 가족, 주변인들에게 ‘적도의 남자’를 홍보합시다. 우리의 작은 정성들이 모여서 기적을 이뤄봅시다.”

글이 뜨자마자 지역과 부서를 막론하고 전사적으로 댓글이 쇄도했다. 드라마가 드라마국 만의 관심사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모든 드라마의 첫 방송 반응이 주도권을 잡는 데 굉장히 중요하다. 3사 동시 시작은 더욱 치열하다. MBC ‘더킹 투 하츠’의 이승기, SBS ‘옥탑방 왕세자’의 박유천이 ‘적도의 남자’의 엄태웅과 삼자 대결에 나섰다.

처음에는 MBC가 기선을 제압했다. 소재나 배우 인지도가 아무래도 우세해 보였다. 그에 비해 ‘적도의 남자’는 아역들이 초반을 장식하고 코믹과는 거리가 먼 진지한 스타일이었다. 뜨거운 욕망을 가진 네 남녀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 정통 멜로극이었다.

KBS직원들의 응원 메시지가 이어지며, 기다려 보자는 반응들이었다. 엄태웅이 등장하면 역전할 것이라는 기대감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우수에 찬 눈빛의 엄태웅이 등장하자 반응이 달라졌다. 이제는 제법 접전이 펼쳐졌다. 특히 압도적인 맹인 연기를 펼치는 엄태웅의 농익은 연기력과 후반부로 갈수록 탄탄해진 복수극이 열기를 가했다.

어쩌다 있을까 말까 한 ‘죽음의 조’ 편성에 누가 우세랄 것도 없이 엎어치기, 메치기로 순위가 왔다 갔다 했다. 각각의 색깔은 확연히 달랐지만, 세 작품 모두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대중성과 작품성을 지닌 우수한 작품들이었다. 결국 꼴찌에서 시작한 ‘적도의 남자’가 후반에는 수목드라마 1위를 장식하며 명예롭게 퇴진했다.

‘적도의 남자’가 중반에 들어설 때쯤, 어느 부부동반 모임에 참석했다. 초면인 상대가 많아 어색함이 흐르려던 찰나, 아내가 자연스럽게 드라마 얘기를 꺼냈다.

“요즘 ‘적도의 남자’가 재밌던데 보셨어요? 어떠세요?”

나는 순간 흠칫했다. 누가 KBS 사장 사모님 아니랄까봐 이렇게 홍보에 나서다니 하면서.

“어머, 저도 요즘 그거 봐요. 엄태웅 씨 연기가 진짜 일품이에요. 눈이 안 보여서 벽을 짚고 걸어가는 장면이 어찌나 실감나던지요?”

“그러게 말이에요. 1박 2일에서 서글서글하니 잘 웃는 분인 줄만 알았는데 카리스마 넘치는 표정이 정말 멋지더라고요.”

드라마로 화제가 열리더니 쉴 새 없이 오가는 대화에 남자들은 그저 듣고만 있을 뿐이었다. 언제 어색했냐는 듯이 금세 웃음이 퍼져나갔다. 나도 자연스럽게 3사 동시 격전을 일화로 꺼내며 거들자 남자들까지 비즈니스 화제로 자연히 넘어갔다.

혹자는 드라마 시청이 시간낭비처럼 여성과 주부들을 매도하기도 하지만, 나는 반대 입장이다. 꼭 방송국 사장이어서가 아니라, 현대사회는 갈등구조가 참 많다. 이럴 때 소설책을 읽어 간접 경험과 위안을 얻듯이 드라마도 비슷한 간접 해소 효과를 준다고 본다.

그리고 요즘 여성들의 눈높이가 워낙 높다 보니 웬만한 드라마는 호응을 얻지 못한다. 재미와 깊이가 어우러져야만 반응이 온다. 그만큼 드라마가 고급화해야 하고 치열하게 준비해야 하는 이유다.

이 드라마를 떠올릴 때 대형사고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에피소드다. 때는 ‘적도의 남자’ 종영을 하루 앞둔 2012년 5월 23일 오후 9시 59분 56초. 19회 방송분으로 72분 제작 예정이었으나 56분 29초까지 드라마가 방송된 뒤 내용이 비정상적으로 끊기면서 블랙 영상이 1초 흘렀다. 이게 뭔 일인가 싶어 시청자들의 전화가 상담실로 몰려 왔고, 송출 담당 스튜디오는 난리가 났다. 하지만 이 사태는 우발적인 실수라기보다 제작진과 송출실 직원들이 피를 말리다가 벌어진 안타까운 사고였다.

워낙 빠듯한 드라마 촬영 일정이라 제작진에서 후반 편집 작업이 지연됐고, 5개로 분리된 편집 테이프를 송출 부조정실로 넘겨줘야 하는데 4개는 받아 송출했지만 마지막 테이프가 미처 오지 못한 것이었다. 비상시 다음 예정 프로그램인 영화를 곧바로 송출해 위기는 모면했다. 결국 드라마가 나갈 본방송 15분 정도가 불방(不放)됐다.

그런데 더 큰 문제가 도사리고 있었다. 드라마가 끝나면 방송광고 후에 CM 14개가 이어서 방송되어야 한다. CM 하나당 1320만 원이니까 14개면 총 1억6500만 원 이상의 손실을 입은 것이다. 즉 손실 광고비를 징구(徵求)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후 방송 사고에 대해 8회에 걸쳐 사과 스크롤을 내보냈다. 이를 계기로 제도도 개선했다. 드라마와 광고를 붙여 만들다 보니 발생한 일이라 비용이 더 들더라도 드라마와 광고 테이프를 분리해 만들도록 했다.

시작 전부터 긴장시키던 ‘적도의 남자’가 끝마무리도 화끈하게 장식하며 막을 내렸다. 적도의 남자 엄태웅 씨는 그만의 명연기로 2012년 KBS연기대상에서 방송3사 PD들이 뽑은 최초의 ‘연기자상’과 ‘중편드라마 우수연기상’을 함께 수상했다.

사장으로서가 아니라 시청자의 한 사람으로서 엄태웅 씨의 명연기에 무한한 경의를 표하고 싶다.전 KBS 사장

◆ 다음은 드라마 ‘각시탈’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