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추노’의 한 장면(2010. 1. 6∼3. 25 방송·24부작) 문화일보 자료사진

‘推奴(추노).’ 제목만 봐서도 이색적이었다. 단순히 노비를 추적한다는 뜻이 아니라 도망간 노비들을 본래 주인에게 돌려주는 추쇄(推刷)의 뜻이란다. 이전의 사극과는 전혀 다른 소재와 발상이었다. 제대로 될 것 같은 느낌이 확 왔다. 더구나 ‘추노’는 내가 사장이 돼 처음으로 만난 드라마였다. 드라마의 사활이 경영의 척도나 다름없는 상황에서 ‘추노’의 의미는 남달랐다. ‘추노’는 드라마국에서 천성일 작가의 시놉시스를 보고 그 자리에서 방송을 결정한 드문 케이스라고 전한다. 영화에서 다져진 작가의 탄탄한 필력에 ‘한성별곡’을 만든 곽정환 PD의 개성이 궁합을 이뤄 탄생했다.

단 하루를 살아도 사람답게 살고 싶었던 도망노비와 단 몇 푼이라도 돈이 된다면 도망노비를 사냥하는 추노꾼. 이들의 어긋난 운명과 이룰 수 없는 사랑이 거대 권력의 음모와 맞물리면서 왈짜패와 무뢰배들이 득실거리는 저잣거리를 배경으로 펼쳐졌다. 초반 눈을 뗄 수 없는 영상과 스토리 전개에 방송 4회 만에 시청률 30%를 돌파하는 진기록을 낳았다.

이런 저력의 원천은 철저한 사전 제작에 기인한다. 방송 일정에 쫓겨 생방송처럼 만드는 드라마 제작 관행을 깨고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100% 사전 제작’을 선언했다. 일찌감치 방송 10회분 사전 제작을 마친 상태에서 방영을 시작했다.

또 경쟁적인 외주제작 시스템이 지나치게 상업적으로 흐른다는 비판을 보완하기 위해 ‘KBS 자체 제작’을 시도했다. 하지만 여러 지역을 이동하며 찍어야 하는 로드무비(Road Movie) 형식 사극이라 제작비가 대하드라마에 육박하는 수준이었다. 그래서 새로운 투자시스템으로 일명 ‘추노 문화산업전문회사’를 유한회사로 설립했다. 이 회사는 문화산업진흥 기본법상 ‘페이퍼 컴퍼니’(서류상 회사)로 KBS 드라마제작국 담당CP가 대표를 맡고 KBS와 외주제작사가 각각 20억 원씩 총 40억 원을 출자했다.

사극은 ‘어떤 시대를 쓰는가’보다 ‘어떤 시대에 쓰는가’가 중요하다고 했던가. 임진왜란 직후인 1609년. 조선 인구의 47%, 한양 인구의 53%가 노비였을 만큼 사람으로 태어났지만 물건처럼 팔리던 노비가 더 많았다는 역사적 사실. ‘추노’ 제작진은 그 조선시대 사회 모순에 주목했다고 밝혔다.

시대를 초월해 이러한 소재에 관심이 끌린 요인이 무엇일까? 신분 간의 갈등, 왕권을 둘러싼 정치 배경과 음모에 긴장을 느끼면서도 신하의 충정, 애틋한 사랑 이야기가 지금의 시대상과 별반 다르지 않게 공감대로 작용한 게 아닐는지. 이처럼 사극은 시대를 넘나들며 허구인 픽션과 사실인 논픽션이 적절히 배합돼 시청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독특한 매력을 지닌 장르라 생각한다.

‘이거 드라마 맞아? 무슨 ‘매트릭스’ 영화를 보는 거 같네.’

갈대밭에서 펼쳐진 대길과 태하의 대결 장면에서 마치 카메라가 360도 돌아가듯 연출된 액션에 잠시 착각을 했다. 게다가 어둠 속에서도 피사체의 윤곽이 뚜렷이 드러나는 액션이 기존 드라마 영상의 한계를 뛰어넘은 기법이었다.

“드라마국장! 영상이 예사롭지 않던데, 무슨 특별한 비법으로 찍은 겁니까?”

“네. 카메라가 특별합니다. 원래 영화 촬영용 카메라인데 아시아 최초, 국내 최초로 미니시리즈 드라마에 도입했습니다.” 드라마 본방송을 앞두고 필수로 거치는 코스가 제작발표회다. ‘추노’를 보고하던 드라마국장이 내게 제작발표회에 참석해줄 것을 진지하게 청해 왔다. ‘추노’를 보고받자마자 제대로 ‘필’을 받았던 나는 망설임 없이 오케이를 했다.

2009년 12월 21일 영등포 모처 ‘추노’ 제작발표회장에 도착했다. 사뭇 낯선 풍경에 어색한 포즈를 감추지 못하고 단상에 올라섰다. 이례적으로 사장까지 나서 ‘추노’를 홍보하니 기자들도 기대감이 더 커진 눈치였다. 드라마를 잘 만드는 것이 우선이겠지만, 잘 만든 드라마를 사전에 제대로 홍보하는 일도 중요하다는 걸 새삼 느낀 자리였다.

언젠가 곽정환 PD가 인터뷰에서 ‘추노’의 홍보와 보도 자료의 절대 원칙으로 ‘추노’ 뒤에 한자(推奴)를 붙이고, ‘도망 노비를 쫓다’라는 문구를 흐릿하게 달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생소할 수 있는 제목에 대한 궁금증을 강렬하게 각인시키는 효과를 노렸다는 것이다. 연출자의 치밀한 홍보 전략에 한 번 더 놀랐었다.

그러나 ‘추노’의 인기가 높아지자 예기치 않은 반홍보 효과가 나기도 했다. 남자 주인공 3인 장혁, 오지호, 이종혁의 몸짱 노출이 화제가 되고 가끔씩 등장하는 비속어의 걸쭉한 대사가 등장하자 방송통신심의위원회로부터 심의 지적이 들어왔다. 제작진이 나름 긴장 모드에 들어갔다. 그러다 여주인공으로 인기 급상승하던 이다해가 부상을 치료하러 들어간 동굴 속 장면에서 어깨와 가슴이 약간 노출됐다. 조심성이 지나친 제작진이 이 장면을 약하게 처리한다며 뿌옇게 모자이크 처리를 한 것이 더 큰 문제를 키웠다.

TV 화면에는 오히려 뽀샤시하게 비쳐지니 더욱 선정적으로 보였던 것이다. 의도와는 반대로 ‘의도된 선정적 장면’으로 방송통신심의위와 공방을 벌여야 하는 웃지 못할 해프닝으로 이어졌다. 이른바 ‘대박 중의 대박’을 거둔 ‘추노’의 화려한 날들을 뒤로한 채 종방연이 왔다. 이번에도 초대를 받고 기꺼이 참석했다.

‘추노’의 두 주역 장혁 씨와 이다해 씨가 헤드 테이블에 자리했고 내가 그곳에 합류했다. 잠시 후 ‘추노’ 팬이 다가오더니 이다해 씨에게 사인을 요청했다. 흔쾌히 응한 이다해 씨가 갑자기 핸드백을 열더니 자신의 얼굴 사진이 인쇄된 팸플릿을 꺼내 그 위에 사인을 해주었다. 순간 나는 그녀의 준비성에 깜짝 놀랐다.

그리고 꼭 언급하고 싶은 프로페셔널로 명품 조연들을 꼽고 싶다. 윤문식, 안석환, 성동일 씨 등 다수의 베테랑 연기자들이 내뿜는 특유의 구수하고 리드미컬한 대사와 연기는 드라마 전체의 강약을 조절하며 감칠맛을 한껏 더했다. 아직도 장면이 생생하고 몇 년이 지나도 그 여운이 오래 지속되는 드라마 ‘추노’. 개인적으로는 첫 단추이자 첫정(情)의 의미가 깃든 애착의 한 지점이다. 전 KBS 사장

◆ 다음 회는 드라마 ‘전우’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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