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그림=황주리 ‘그대 안의 풍경’

황주리/서양화가

온 국민의 축제였던 대통령 선거도 끝났고, 지구 종말의 날이라던 2012년 12월 21일도 무사히 지나갔다. 이제 우리는 조용히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하긴 지구의 종말이 별건가?

내 삶이 끝나면 세상도 끝인 것이다. 오늘도 누군가는 자신의 삶을 비관하여 높은 곳에서 떨어져 자살을 하고, 누군가는 병마에 시달리다가 혹은 사고사로 세상과 결별한다. 어쩌면 자연사란 모든 인류의 죽음에 관한 소망이다. 하지만 노화를 계속 늦춘다면 죽지 않는 세상이 오는 건 아닐까? 러시아에 영하 60도의 혹한이 닥쳐 123명이 숨졌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무서운 자연의 힘을 이길 수는 없는 모양이다.

영하 10도 안팎의 요즘 추위에도 어릴 적 내복을 껴입고 학교에 가던 살얼음 추위가 생생하게 떠올랐다. 왜 그 옛날의 겨울들은 늘 그렇게 추웠을까? 아마도 우리 몸속에 기름기가 별로 없었던 까닭인지 모른다. 참기름 한 방울 떨어뜨려 마가린에 밥을 비벼먹던 시절, 마가린은 참으로 귀하고 맛있는 음식이었다. 멸치다시(맛국물)를 한 국물에 밀가루를 듬성듬성 뜯어 넣어 끓인 수제비의 맛도 잊을 수 없다. 생전의 아버지는 전쟁 때 제일 많이 먹은 게 수제비라시며 썩 좋아하지 않으셨다.

어린 시절의 추운 겨울날 할머니가 끓여주신 뜨거운 수제비와 동치미 국물을 먹던 날들이 아련하다. 어머니의 빨간 내복을 어찌 잊으랴? 먹고 살 만해진 뒤에도 어머니는 그 빨간 내복을 버리지 않으셨다. 띄엄띄엄 기운 그 빨간 내복을 나는 액자에 넣어두고 싶다. 그보다 아름다운 예술이 어디 있으랴? 우리가 죽지 않는 한 지구의 종말은 오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들의 짧지 않은 삶 속에서 세상이 끝난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그런 날들은 참 많다.

어쩌면 산다는 건 사막을 건너는 일과 닮았다. 사랑하는 가족이 세상을 떠난 날, 입학시험에 떨어진 날, 실연을 당한 날, 자신이 뽑은 대선 후보가 낙선한 날, 그 중에서도 가장 절망적인 날은 물론 사랑하는 가족이 세상을 떠난 날일 것이다. 그날을 경험한 사람들의 공통적인 깨달음은 슬픔보다 힘이 센 일상의 무게일지 모른다. 서른 살 무렵, 사랑하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을 때, 나는 뉴욕에 있었다. 한밤중에 갑자기 돌아가셨다는 전화를 받은 순간 내가 한 일은 다음날 서울 가는 비행기 표를 예약하고, 고기와 생선과 야채들이 가득 든 냉장고 청소를 하는 일이었다. 아무리 슬퍼도 세상의 톱니바퀴는 우리의 아픔과 무관하게 돌아가고, 살다보면 아무리 슬픈 기억도 마음속의 훈장처럼 단단해진다.

추운 날은 살아 있다는 게 더욱 실감이 난다. 그 추웠던 대선 투표의 날 우리 남매는 어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주민등록이 되어 있는 먼 투표장을 향했다. 만감이 교차하는 날이었다. ‘국민교육헌장’을 외우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자동 응답기처럼 머릿속에 떠오르던 그 문구가 얼마나 강력한 힘을 지닌 것이었는지 감회가 새로웠다.

그렇게 무거운 사명을 머릿속에 이고지고 자라난 세대. 부모들로부터 전쟁의 끔찍함을 듣고 자란 반공교육 세대, 5060 세대가 연로한 부모님을 휠체어에 태우고 투표장에 갔다는 건 놀랄 일이 아니다. 온통 금지된 것들로 가득했던 젊은 날, 자유민주주의를 외치던 우리 세대의 어두운 젊음에 관해 지금의 젊은이들이 관심이나 있을까? 최루탄 냄새 속에서 우리들의 청춘은 매일 휘발했다. 하지만 나이는 괜히 먹는 게 아니다. 하루 햇살이 무섭다는 말도 틀린 말이 아니다. 시간은 무서운 경험의 축적이다.

독재 정권 아래 고통스러운 가족사를 지닌 사람에게는 할 말이 없다. 그들에게는 겸허한 조의를 표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두 분의 부모님이 모두 비명횡사한 박근혜 새 대통령 당선인에게 독재자의 딸이라고 너무도 쉽게 말하는 사람들은 참으로 모질다. 그 일들이 다 우리들의 이십대에 일어난 일이기에 상처도 미움도 다 생생할 뿐이다. 나는 상처가 힘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중의 하나다. 그녀의 상처가 힘이 되어 이 나라에 희망의 이정표를 세워준다면 참 좋겠다고 나는 생각한다.

언젠가 라디오를 듣다가 어느 오지 레이서가 말한 이런 구절이 마음에 남았다. 사막을 건너는 법은 시간을 잘게 쪼개는 일이라고. 먼 미래에 대한 걱정은 접어두고 일단 5분 뒤를 걱정하는 일이라고. 사막을 건너는 데 중요한 건 모두가 한마음으로 뭉쳐서 멀리 가는 일이라고. 65세 이상의 모든 어른에게 지하철 무료 승차권을 주는 데는 나도 반대다. 요즘의 65세는 청년이다. 75세로 올려야 옳다. 어쩌면 한참 뒤에는 85세로 올려야 할지도 모른다.

나는 어차피 노인들이 많아지는 세상, 이왕이면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힘센 노인이 많아지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믿고 기대고 배울 것 있는 어른들이 존재하는 세상, 그런 세상이 얼마나 좋은가? 아직도 어려운 시절의 빨간 내복을 내다버리지 않은 내 어머니로부터 오늘도 나는 사막을 건너는 법을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