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오스의 글쓰기 / 모리스 블랑쇼 지음, 박준상 옮김 / 그린비

먼저 경고. 낯선 개념과 압축 또는 암시로 가득한 이 책은 읽어내기가 만만찮다. 차근차근 읽어 책의 마지막 장까지 도달하는 데는 ‘각오나 다짐이 필요할 정도’라고 해도 좋겠다. 옮긴 이의 공들인 번역에도, 책 뒤편에 적지 않은 분량의 ‘해제(解題)’를 덧붙였음에도 그렇다는 얘기다.

저자는 모리스 블랑쇼. 2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 문학 전성기의 한가운데서 오로지 글쓰기에만 천착했던 작가이자 비평가, 철학자다. 그는 구체적인 사물의 묘사가 전혀 없는 이른바 ‘반리얼리즘’으로 일관하며 정신의 무한한 순환운동을 우의적(寓意的)으로 표현한 독특한 관념소설과 함께 독백 형식의 비평을 발표했다.

삶에서도, 문학에서도 그는 철저한 은둔자였지만, 현대 문학과 철학의 흐름을 새롭고도 비판적으로 이어가는 이른바 ‘바깥의 사유’를 전개시키며 문학의 본질에 대해 깊은 통찰로 명성을 떨쳤다.

책은 저자가 일기를 쓰듯 하루 일정 분량 쓴 글을 묶은 것인데, 더러는 메모 스타일로, 더러는 정교하고 함축적인 문장으로 깊은 사유 끝에 도달한 결론을 토막토막 다루고 있다. ‘글쓰기’에 대한 책이라지만, 정작 다루는 이야기는 글쓰기 과정이나 지향점의 범주를 훌쩍 넘어선다. 타인과의 관계, 삶의 태도는 물론이거니와 도달하고자 하는 본질 너머 궁극의 철학적 질문까지 쉴 새 없이 던지고 또 스스로 답한다. 책장을 뒤적여서 몇 구절을 뽑아내 보자.

“죽어간다는 것, 그것은 절대적으로 말하며 끊임없이 임박해 와서 삶을 욕망 가운데 두고 지속시킨다. 언제나 이미 지나가 버린 것이 임박해와서.”

“고통은 결백하기에 고통스러운 것이다. 고통은 완화되면서 죄 있는 것이 되고자 한다. 그러나 고통 속의 수동성은 모든 잘못으로부터 벗어나 있다. 틀림없이 수동적인, 구원에 대한 생각으로부터 구원받은 고통이 있다.”

저자는 이런 방식으로 인간이 존재의 질서를 구성하거나 의식화, 또는 내면화할 수 없는 불가능의 지점인 ‘카오스’에 대해 말하고, ‘나’와 결코 융합될 수 없는 존재의 본질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삶을 침식해 가는 죽음의 경험에 대해 말한다.

낯선 개념의 등장과 암시와 압축, 난해하게 얽혀 있는 문장은 짧은 단문조차 도리 없이 몇 번이고 되짚어 읽게 만든다. 반복된 읽기를 통한 해독작업의 결과는 사색이거나 좌절이다.

책은 모리스 블랑쇼 선집 중 6번째로 출간됐다. 이 책을 손에 쥐기 전에 이미 간행된 ‘죽음의 선고’ ‘문학의 공간’ ‘도래할 책’ 등 블랑쇼의 대표적인 저작들을 순서대로 읽어 먼저 그의 철학적 지향과 사유 등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 것이 좋겠다. 저자가 책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나 전체적인 구성을 염두에 두지 않은 채 단상을 던져 놓았으니, 손에 잡히는 대로 책장을 넘기다가 눈에 띄는 구절을 읽는 것도 이 책을 읽는 하나의 방법이겠다.

박경일 기자 parking@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