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통일신라 말기 권력층의 난맥상을 보여주는 연극 ‘멸’은 현대적 감각으로 포장돼 있다. 경순왕 김부(왼쪽·정보석 분)가 견훤(신덕호 분)에게 희롱당하는 장면. 국립극단 제공

‘역사적 사실의 현대적 재생’. 지난 4일부터 18일까지 서울 용산구 서계동 국립극단 내 백성희장민호극장에서 공연하는 연극 ‘멸’(사진)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스토리를 현대에 맞게 각색, 오늘의 이야기로 되살려냈다’고 할 수 있다. 그만큼 작가적 상상력을 발휘, 1000여 년 전의 신라 멸망사를 한국 현대 정치사의 한 장면으로 읽어도 무방할 만큼 시사성을 가미했다.

올해 국립극단이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삼국유사 프로젝트’의 네 번째 작품인 ‘멸’은 삼국유사 ‘기이 제2’ 중 ‘김부대왕’을 모티프로 하고 있다. ‘김부대왕’ 편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경순왕(신라 마지막 왕), 마의태자, 낙랑공주가 나오는 원전이다. 극본을 쓴 김태형 작가는 원전을 현대적 감각으로 뒤틀어 신라의 멸망을 새롭게 해석한다. 왕조멸망사를 통해 권력에 내재해 있는 인간의 욕망과 질투를 적나라하게 그리고 있는 것이다.

극의 줄거리는 이렇다. 사촌지간인 경애왕을 해하고 왕위를 찬탈한 김부는 신라의 56대 왕이 된다. 하지만 권력을 잡았다는 기쁨도 잠시, 김부는 후백제와 고려의 계속되는 압박에 서서히 무너져 가는 신라의 운명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다. 열패감에 빠진 그에게 유일한 기쁨을 주는 존재는 고려 태조 왕건의 딸 낙랑. 고려와의 관계에서 우위를 선점해 보려는 심산으로 김부는 낙랑 공주와 연애를 시작하지만, 낙랑에 대한 묘한 감정은 갈수록 깊어진다. 급기야 김부는 그녀에게 청혼하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그에겐 엄연히 죽방왕후와 두 아들이 있다. 당연히 이들과 갈등을 빚으며, 왕조는 파국을 맞는다.

연극 ‘멸’은 서로를 향한 배신과 복수를 통해 오로지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일에만 관심 있는 인물들을 보여준다. 사촌을 살해하고 왕위를 찬탈한 경순왕 김부는 물론이거니와 남편에 대한 환멸과 증오로 결국 위험한 선택을 하는 죽방왕후, 보다 손쉽게 신라를 ‘접수’하기 위해 기꺼이 김부와의 결혼을 약속하는 왕건의 딸 낙랑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새로운 권력을 만들려는 김일(마의태자), 형에 대한 열등감에 괴로워하는 왕자 김굉에 이르기까지 이들의 치열한 욕망은 천년 역사를 간직한 신라의 마지막 민얼굴을 여실히 드러낸다.

연극에선 말투와 행동을 비롯, 의식주 같은 생활문화도 완전히 현대적으로 연출된다. 극적 배경을 현대화했을 뿐만 아니라 등장인물들의 몸짓이나 대사 역시 오늘의 시류와 맞닿아 있다. 이는 곧 관객에게 자연스레 한국 현대 정치사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하면서 오늘날에도 여전히 진행되고 있는 ‘권력과 욕망의 이중주’를 들려준다. 어쩌면 작가는 ‘왕가의 정치’도 ‘마피아의 위계질서’와 다르지 않으며, 이들의 욕망 역시 거의 같은 색깔임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 아닐까.

연극의 첫 장면과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남녀의 ‘교합제’ 장면은 매우 자극적이다. 박상현 연출은 “정사신을 통해 완숙하다 못해 퇴폐에 이른 신라 말기의 권력층을 보여주고 싶었다”며 “역사적 소재를 현대적 누아르로 만들려고 노력했다”고 밝혔다. 정보석·신덕호·정나진·성노진·송영근·정윤경·우미화·이동준·서동갑 등 출연. 1688-5966

김영번 기자 zerokim@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