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슈얼 트라우마 / 정국 지음 / 블루닷

지금 한국사회에 가장 필요한 책이다. 아동대상 성폭력을 비롯, 여성에 대한 성범죄가 줄을 잇고 있는 요즘, 이 사안에 대한 가장 명료하고 객관적인 접근을 이 책은 보여주고 있다. 작금의 우리 사회는 여성(특히 아동) 대상 성범죄에 대해 신경증적인 반응만을 보이며 문제의 본질과 실상에 대해 제대로 접근하지 못하고 있다. 오죽하면 ‘궁형’ 같은, 고대사회에서나 가능했던 (그것도 몇몇 사례에서만) 형벌을 도입하자는 말까지 나오겠는가. 이처럼 비이성적인 접근은 오히려 문제를 더욱 악화시킬 뿐이다.

현재 거론되고 있는 성범죄 논의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빠져 있다. 바로 아동 성폭행 피해자들의 치료에 대한 문제다. 그들이 겪어야 하는 참혹한 현실을 도외시한 채 사안을 범죄에 대한 형사적 처벌로만 귀결시키는 것은 오히려 피해자들의 상처를 키우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즉, 피해자의 신체적 치료뿐만 아니라 그들의 정신적 외상에 대한 치료를 지속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실행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세계적으로 저명한 정신과 전문의인 저자는 우선, “아동에 대한 성폭력의 문제는 법률적 대응 이전에 인간의 삶에 뿌리박고 있는 심각한 사회적 문제라는 인식에서 다뤄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단순히 일회성, 대증요법적인 대책이 아니라 근본적이고 지속적인 문제해결의 의지를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즉 원인과 배경, 피해자에 대한 치유와 구제, 이 문제에 대한 전문가 그룹의 육성과 사회적 시스템의 확보 같은 국가적 차원의 대응이 마련돼야 한다는 지적이다. 저자에 따르면, 현재 연일 보도되고 있는 끔찍한 사건들이 사실은 가시적으로 드러난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으며, 그보다 수많은 사건들이 수면 아래에 감춰져 있다. 이에 대한 저자의 진단을 들어보자.

“다양한 통계 자료가 존재하지만, 최소치로 추정하더라도 전세계 여자 아동의 25%, 남자 아동의 10% 가량이 성인기 이전에 성폭력이나 성 충격을 경험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런 아동 성학대 피해자들은 뿌리 깊은 수치심과 죄책감 속에서 혼란스럽고 두려운 비밀을 마음속에 깊이 감춘 채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더 심각한 문제는 당사자뿐만 아니라 주변의 모든 이들에게 간접적인 영향이 전가된다는 점이다. 따라서 하나의 성학대 사건에 따른 피해자는 한 명이 아니라 많게는 수십 명, 혹은 수백 명에 이를 수도 있다.”

성범죄, 특히 아동 성폭력은 지구상에서 가장 만연한 범죄라는 것이 저자의 진단이다. 심지어 미국의 경우 여아의 27%, 남아의 16%가 근친상간을 당한다는 통계가 있을 정도다. 성범죄에 관한 한 어디에도 안전한 곳은 없다. 성폭력 사건의 대부분은 가정과 직장, 학교에서 벌어지고 있으며 더욱 경악스러운 것은 가해자의 대다수가 낯선 외부인만이 아닌 피해자의 가족, 친지, 이웃, 친구들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피해자들이 겪어야 하는 증상은 어느 정도일까. 이에 대해 저자는 “성학대의 희생자들 또한 다른 종류의 충격을 경험한 환자와 마찬가지로 심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는다. 정신과 전문의의 진료를 받는 환자들은 대부분 공황장애, 우울증, 혼란, 환영, 자살 충동, 편집증, 약물과 알코올 중독, 식이장애와 자해를 비롯한 자기 파괴적 행동을 보인다. 또한 정신적인 문제는 신체 질병으로 이어져 비만, 당뇨, 섬유근육통, 관절염, 고혈압, 동맥경화, 심장병 등을 비롯한 각종 심혈관계 질병, 만성 스트레스로 인한 여러 질병을 일으키는 경우가 흔하다”고 말한다. 한마디로, 생명 자체를 위협하는 치명적인 질환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아동 성학대에 따른 피해는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막대하다. 저자는 “아동 성학대의 피해자와 그 가족들이 겪는 개인적인 피해는 차치하고라도, 국가적 차원에서 보면 성적 트라우마가 흡연이나 비만의 문제와 맞먹거나, 그 이상의 막대한 의료 비용을 초래한다”면서 “(미국의 경우) 성적 트라우마는 국가적으로 매년 1조 달러의 비용을 추가로 지불하게 할 수 있으며, 몇 년 안 되는 짧은 기간 수조 달러를 추가시킬 수도 있다”고 진단한다.

결론적으로 이 책은 성폭력, 특히 아동 성학대에 대한 본질적인 이해와 대중적 인식의 전환을 유도하고 있다. 아울러 희생자에 대한 치유와 사회적 구제에 대한 구체적인 매뉴얼을 제공하고 있다. 예를 들어, 주변에서 피해자의 경험을 이해하도록 노력하는 것은 물론, 피해자 스스로 현재의 부정적인 모습이 성 충격의 고통과 혼란 때문임을 직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아동 성폭행은 전세계에서 가장 밝혀지지 않은 전염병과도 같다”고 단언한다. 책을 통해 이 같은 저자의 진단이 결코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P.S.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가장 민감한 주제 중 하나는 ‘성적 트라우마 희생자들이 갖는 특징과 힘’에 대한 것이다. 성적 트라우마는 방치할 경우 끔찍한 비극으로 치닫게 되는 매우 위험한 질환이지만, 성적 트라우마로 인한 고통과 혼란을 극복하고 놀라운 삶의 쾌거를 이뤄낸 사람들의 이야기도 책에서 다루고 있다. 심지어 저자는 그들이 성적 트라우마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성적 트라우마 ‘때문에’ 경이로운 창조적 에너지를 발휘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김영번 기자 zerokim@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