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엄홍길 대장이 지난 7일 산행 중 영봉(604m)에서 인수봉과 백운대를 가리키며 북한산과의 인연을 이야기하고 있다. 심만수 기자 panfocus@munhwa.com

지난주 원도봉을 다녀와 엄홍길(52·밀레 기술고문) 대장에게 ‘다음은 어느 산에 가야 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거침없이 “그야 북한산, 아니 삼각산이죠”라고 답한다. 그러면서 “삼각산이 ‘본명’이고 북한산이 ‘일명’인데 주객이 전도된 것”이라며 “우리도 앞으로 삼각산으로 부르자”고 제안한다. 주객이 전도된 얘기는 따로 하기로 했다.

원도봉을 자신의 ‘모산(어머니 산)’으로 소개했던 엄 대장에게 북한산(삼각산)은 또 어떤 산일까. 그는 “북한산은 산악인들에겐 ‘요람’ 같은 곳”이라면서 “산악인으로 입문하고 백운대, 인수봉을 오르며 고봉과 암벽·빙벽 등반의 꿈을 꾸고, 해외 원정 등반을 준비했다”고 답했다. 또 북한산은 산악인에게 ‘좌절의 산’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인수봉 등에서 암벽 훈련을 하다가 사고를 당해 짧은 산악 인생을 마감한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세계 8000m급 고봉 16좌를 완등한 그가 히말라야 원정을 꿈꾸게 된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고 한다. 1977년 9월 한국인으로는 처음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한 고 고상돈 씨의 당시 신문 1면 톱에 실린 사진과 기사를 보고서였다.

“당시 북한산 인수봉에서 본격적인 암벽 등반을 배우던 시기였는데, 고상돈 선배가 히말라야 정상에서 산소마스크를 쓴 채 태극기를 들고 서 있는 모습의 사진을 본 순간 내 가슴이 어찌나 뛰던지요. 눈물이 날 정도였죠. 선배가 입고 있던 위아래 빨간색의 방한복, 고글 등 가슴이 쿵쾅거렸어요. 나도 정상, 그것도 세계에서 최고로 높은 곳에 서 보자고 결심했죠.”

엄 대장은 그의 우상이 된 고상돈 씨를 만나기 위해서라도 이후 북한산을 거의 매주 찾았다고 한다. 북한산이 산악인들의 대표적 모임 장소였고 교육의 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웅과의 만남은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당시 고상돈 씨는 충북산악회에서 활동하고 있던 데다, 1979년 북미 최고봉 매킨리를 등정한 후 하산하다 추락해 31년의 짧은 산악 인생을 마감했기 때문이다.

그는 “나에게 고봉 등반의 야망을 품게 했던 고상돈 선배의 손이라도 한번 잡고 싶었는데…”라며 당시 품었던 고봉과 산에 대한 열정을 회고했다.

지난 7일 엄 대장과의 두 번째 산행에서는 동행인이 조금 늘었다. 그가 1년 전 스리랑카에서 함께 봉사 활동을 했던 ‘코이카(KOICA)의 꿈’ 원정대원들이 동행했다. 엄 대장은 “사회 여러 분야에서 ‘꿈’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살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산행을 통해 또 다른 ‘희망’과 ‘도전 정신’을 심어 주는 청소년 및 젊은이들과의 동반 산행은 오히려 나에게 힘이 되기도 한다”고 동반 산행의 기쁨을 설명했다.

그는 “북한산은 한두 번 오르며 다 소개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다”면서 2, 3회 연재를 제안하기도 했다. 그만큼 코스가 다양하고, 자신과 얽힌 사연도 많다는 것. 그래서 이날은 우이동 유원지에서 출발, 영봉에 올라 백운대-대동문-진달래 능선-다시 우이동 아카데미하우스 입구로 내려오는 코스를 잡았다고 했다. 초보 등산객에게는 다소 힘든 코스로 5시간여가 걸렸다.

초입부터 호기롭게 속도를 내는 단원들에게 그는 “천천히 가야 끝까지 갈 수 있다”고 조언했다. 조금은 가파른 영봉 쪽 능선을 오르자 일행 중 한두 명이 처지기도 했다. 히말라야를 내 집처럼 오르내린 엄 대장도 숨을 가쁘게 쉬며 땀을 쏟아 냈다. 하지만 그의 히말라야와 산 이야기는 계속됐다.

그가 처음 히말라야에 도전한 것은 지난 1985년 에베레스트부터였다. 예전에 문화일보의 ‘사랑·희망 전령사’ 인터뷰를 위해 만났을 때 엄 대장은 히말라야 원정과 관련,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기적이라고 할 정도로 살아 있는 것이 신기하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그는 “그런 면에서 북한산은 나에게 ‘재기의 산’이기도 하다”며 다시 히말라야 얘기를 꺼냈다.

엄 대장이 11번째로 8000m급 고봉 등정에 성공한 산이 ‘안나푸르나’였다. 히말라야 등정은 매번 ‘사투’였지만, 그중에서도 ‘이제 더 이상 신(神)이 내게 히말라야 등정을 허락하지 않는구나’라고 생각했던 곳이 안나푸르나였다고 말했다. 엄 대장에게 ‘4전5기’ 코스였던 안나푸르나에서 그는 세 명의 동료를 잃었다. 그도 산악인의 인생을 중단해야 했을 정도의 큰 부상을 당했다.

“네 번째 도전할 당시(1998년) 7600m 지점에서 오른발이 180도로 꺾이는 부상을 입었죠. 덜렁거리는 다리를 부여잡고 2박3일 동안 4500m 지점의 베이스캠프까지 기어 내려왔어요. 외줄 로프 하나를 잡고 잠 한숨 못 잔 채 빙벽과 암벽, 설벽을 지나오면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느꼈습니다. 살아 내려온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 보였어요. 그렇게 혼미한 정신 속에서도 저를 붙잡은 것은 ‘목표에 대한 확신과 재도전 의지’였죠. 마지막 순간까지 희망의 끈을 놓을 수 없었습니다.”

그날의 부상으로 엄 대장은 의사로부터 재기 불가능 판정을 받기도 했다. 부러진 발목과 무릎은 지금까지 장애가 남아 있을 정도로 심각한 수준. 그러나 그는 스스로 재활에 나섰다. 당시 담당 의사는 산행을 하면 안 된다고 경고했지만 엄 대장은 집 뒤의 북한산 진달래 능선을 매일 오르내렸다. 그만의 재활 훈련이었다. 엄 대장은 그렇게 진달래 능선에서의 재활에 성공, 1년여 만에 다시 안나푸르나에 도전해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고 한다.

이날 산행에서도 엄 대장은 하산 중 진달래 능선 아래 계곡에 발을 담그며 완전히 굽혀지지 않는 오른발을 보여 주면서 당시를 회상했다.

그와의 산행에서는 많은 사람을 만난다. ‘히말라야의 기(氣)’를 받겠다고 악수를 청하는 사람부터 기념 촬영을 부탁하는 사람들로 인해 항상 바쁘다.

그들 가운데 누군가는 ‘세계 최고봉을 모두 올랐으니 더 이상 오를 산이 없지 않느냐’면서 그의 수도권 산행을 의아해 하기도 한다. 엄 대장은 그렇지 않다고 했다. 그는 “높은 산이나 낮은 산이나 저마다 정기와 희망을 품고 있고, 또 다른 깨달음을 주죠. 그래서 나는 산행을 멈출 수 없습니다”고 말했다.

박광재 기자 kj59@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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