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호미술관과 학고재화랑에서 지난 11일 막 올린 화단의 중진 김태호(59) 서울여대 교수의 ‘스케이프 드로잉(Scape Drawing)’전은 여러모로 이례적이다.

한 작가의 작품이 대형 전시공간 두 곳에서 동시에 진행되는 것부터 드문 일이다. 게다가 풍경을 뜻하는 ‘랜드스케이프’에서 ‘랜드’를 떼내고 ‘드로잉’을 더한 제목에 드러나듯 드로잉 위주로 평면작품을 한데 모았다. 특히 미술관 전시는 캔버스를 입체적으로 설치해 관객과 교감하는 연극무대처럼 연출했다.

“갓 담은 겉절이와 오래 곰삭은 묵은지가 같은 김치이면서 풍미는 확연히 다르다. 드로잉이 겉절이라면 회화는 묵은지다.”

흔히 회화의 밑그림, 기초작업 정도로 여기는 드로잉. 그러나 작가는 “드로잉은 준비단계라기보다 진행형의 작업”이라고 지목하며, 드로잉의 확장 개념으로 작품들을 풀어낸다.

금호미술관(6월3일까지)에는 지하부터 3층까지 4개층 전시작이 대부분 형상은 사라진 단색 화면이다. “작품이 어디 있느냐”고 의문을 제기할 수도, 반대로 한 작품에서 무수한 이미지를 읽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있는 듯 없는 듯, 작가는 무언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기보다 오히려 미니멀한 색과 표현을 통해 관객을 명상과 사유의 시간으로 인도한다.

2006년 개인전의 주제가 ‘모호함’이었던 작가는 이번엔 아예 ‘멍때림’이라는 다소 엉뚱한 단어를 내세웠다. 촛불 보듯 멍하게 대상을 대하고, 그 순간에 빠져보라는 이야기다. 그는 얼마전 전등사 가는 길에 접한, “아무것도 없는 풍경이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라는 불교 글귀를 인용하며, 형상이 생략되고 여백이 주가 되는 작업을 펼친다.

그리기뿐 아니라 지우기, 아예 물감을 수십 겹 중첩해 칠하기도 드로잉이라는 작가. 드로잉 위주의 학고재화랑(6월10일까지) 전시에선 텅빈 화면 위주의 미술관 전시와 달리 오히려 나무, 의자 등이 형태를 드러낸다. 한자 정(靜), 단(端) 등 구체적 글씨도 등장한다. 하늘, 숲을 촬영한 사진, 누런 종이에 검은 먹의 흔적도 과정이 담긴 드로잉으로 분류됐다.

은은한 단색의 대형유화 7점이 나란히 걸려있는 미술 2층 전시장의 중앙엔 나무 평상이 놓여있다. 크고 작은 단색유화가 놓여있는 3층의 경우, 바닥에 검은 거울과 흰 판을 깔고 그 위로 통로 삼아 나무덱을 깔았다. 1층엔 서양 골동가구와 작품이 어우러지고, 지하에선 각양각색 소형 유화들이 그림의 숲을 이룬다.

작가는 나무 평상에 앉거나, 그림의 숲을 산책하듯 걸으면서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그저 바라보라”고 제안한다. 호수 수면 같은 검은 거울바닥, 눈 쌓인 겨울 같은 흰 바닥의 3층 전시장에서 캔버스가 시시각각 서로 빛을 반사하고 흡수하는 모습에서 순간 호숫가, 설원에 있는 듯 다양한 풍경을 느껴보라는 것.

작가가 수십 번 물감을 쌓아올린 전시작은 천연광, 조명이나 관객의 움직임에 따라 단색 화면 위로 시시각각 미묘한 변화를 드러낸다. 은은한 녹색을 수십 번 칠한 동일한 단색 그림도 관객의 눈높이는 물론 입은 옷색깔에 따라 바뀌어 ‘10인10색’ 이 연출되기 때문이다. 두 전시장을 찬찬히 둘러보는 가운데, ‘회화 같은 드로잉’과 ‘드로잉 같은 회화’, 그 둘 사이의 모호함을 시각적으로 체험할 수 있다.

신세미 기자 ssemi@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