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세월이 흘러도 빠른 말로 휘어잡는 속사포 코미디, 배포있게 던지는 호탕한 웃음소리는 전혀 식지 않았다. 요즘 코미디에 대해 메시지는 없고 말장난만 있다고 따끔하게 충고하는 그는 “내겐 은퇴란 없고 조퇴만 있을 뿐”이라며 “기회가 된다면 정극에 도전하고 싶다”고 했다. 심만수기자 panfocus@munhwa.com

콧등 점이 매력적인 코미디언 배연정(61)을 만난 곳은 방송사도 ,‘소머리 국밥집’도 아니었다. 서울 송파구 풍납동에 위치한 서울아산병원에 그가 노란색 코트에 금빛 바지로 멋을 부리고 나타났다. 여전히 30대처럼 ‘맑고 고운’ 피부를 과시하는 그는 얼굴을 드러내자마자, “아니, 이 늙은이를 뭘 인터뷰하겠다고…”하며 투정을 부렸다. 그가 ‘병원’을 찾은 것은 매달 한번씩 받아야 하는 정기 검진의 일환이다. 9년 전 췌장에 큰 종양이 생겨 대수술을 통해 완치 판정을 받았으나, 평생 관리 차원에서 들르는 것이다. 사진 촬영을 위해 병원 밖으로 걸어가는 10분 동안, 한국을 대표하는 이 여성 코미디언은 몇 가지 ‘병원 에피소드’를 들려주며 듣는 이의 배꼽을 자극했다.

“병원에서 췌장 종양 제거 수술을 받고 중환자실로 이동하는데, 옆에 있던 환자가 ‘배연정씨 지금 나 웃기려고 그러는 거지? 어제 TV에서 봤는데 이런 식으로 웃기면 어떡하냐’고 깔깔 웃더라고요. 나는 아파 죽겠는데, 그렇다고 말도 안나오지. 그래서 같이 웃었지 뭐. 그리고 병실로 옮겼더니, 이번에는 사인해달라고 아픈 몸을 이끌고 오는 환자를 보게 된 거야. 그러니 또 안웃겨? 호호호.”

그의 병은 흔히 ‘췌장암’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은 암으로 가기 직전 3개의 종양으로 고통받았을 뿐이다. 췌장의 대부분을 잘라내다보니, 위와 소장, 대장의 위치가 흔들렸고, 이 때문에 내장 대부분을 들어내고 다시 맞추는 대수술을 받았다. 그는 “한 두달 늦게 발견했으면 암이 됐을 뻔했는데, 천운(天運)이었다”고 했다. 그의 인생은 한 편의 드라마다. 가수로 데뷔해 순식간에 코미디언으로 행보를 바꿨고, 다시 ‘소머리 국밥집’ 사장으로 180도 탈바꿈했다. 대수술에 미국 사업 실패로 우울증까지 겪었던 그는 그러나 여전히 코미디언답게 ‘웃음’을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달고 산다. ‘억척 아줌마’로 달려왔던 지난 인생을 들어봤다.

―피부가 좋은데, 이제 병은 재발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수술할 때 췌장 5㎝ 남겨놓고 13㎝를 잘랐거든요. 지금은 관리 차원 정도여서 큰 문제는 없어요. 제 피부로 말하면 유전이에요. 좋은 피부를 물려받아서인지 피부과 근처에 가 본 적도 없어요. 콧등 점은 그냥 놔두려고요. 이제 없애기도 그렇고….”

―연예계 생활을 접고 갑자기 ‘국밥집’을 하셨는데요.

“밥벌이를 위해 야간 무대를 저만큼 많이 한 연예인이 없을 거예요. 하루에 13군데를 뛰었으니까요. 스탠드바, 나이트클럽, 카바레 등 4가지 업종을 돌아다니면서 정말 악착같이 일했어요. 그런데 어느날 손님이 술에 취해서 저를 보고는 ‘얘는 아직도 야간 무대에서 먹고사나’하더라고요. 그 말이 그 이후부터 귓가에 짱짱하게 남아 있었어요. 이제 내려놓아야겠다는 생각이 그때 들더라고요. 그래서 40대 초반에 일을 접었어요. 그리고 제가 연예계에서 제일 싫은 게 나이 먹고 행사 하나 따려고 여기 저기 기웃거리면서 ‘이 나이에 불러주는 게 어디냐’며 비위 맞추고 사는 인생이었어요.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니까, 쉽게 접을 수 있었죠. 그리고 바로 국밥집을 향했어요.”

―왜 하필이면 ‘국밥집’이었나요.

“가족들과 설악산 여행을 떠나다 밥을 먹기 위해 우연히 국밥집에 들렀어요. 거기서 사장이 가게 인수받을 생각없느냐고 제안하길래, 곰곰히 생각해봤죠. 그때부터 시장조사하러 다녔어요. 교통 체증이 어디서 시작되는지, 길목은 좋은지 그 이후로 몇차례 방문하면서 조사해보니까 그냥 열심히 하면 될 것 같았어요. 그리고 제가 연예계 활동을 하면서 일반 팬들과 가깝게 만나본 적이 거의 없었어요. 1988년 서울 63빌딩에서 디너쇼를 한 게 팬들과 가깝게 만난 마지막 무대였어요. 국밥집을 하면 팬들을 더 가까이서 볼 수 있을 것 같아서 더 끌렸죠.”

―소위 ‘국밥집 식모살이’가 적응이 안 됐을 것 같기도 한데요.

“평소 같았으면 끔찍한 일이었죠. 해 본 적이 없으니까. 배추 300포기 김치를 담가야 하는데, 처음에는 이 일을 다 어떻게 할지 막막할 뿐이었어요. 하지만 일도 요령이 필요하다는 걸 배우면서 하나도 겁나지 않았어요. 일을 해보니, 이게 적성에 맞더라고요. 제가 9세때 직접 밥을 해먹었어요. 옆에서 어머니가 밥하고 꽁치 조리고, 비지찌개 하는 걸 지켜보다, 제가 직접 해서 상을 차려놓으면 엄마가 일하고 와서 보고는 깜짝 놀라는 거예요. 그렇게 뿌듯해하시는 어머니 모습을 보니, 더 하고 싶었어요. 남의 집에 가서 처음 먹어 본 음식도 기억해놨다가 집에서 다시 해보고. 어쨌든 이 계통에 잘 맞았던 것 같아요.”

배연정의 ‘소머리 국밥집 창업 과정’은 그야말로 고난의 연속이었다. 1996년 곤지암 ‘소머리 국밥집’에 오면서 그는 사골과 볼살이라는 단순한 재료로 소위 ‘대박’을 치자 이웃 가게들이 그를 쫓아내려고 난리 법석을 떨었다. 텃새에 짓눌리면서도 그는 ‘아줌마 근성’으로 버텼다. 주차장 땅을 빼앗길 땐 창피함도 잊고 포클레인 앞에 드러눕기까지 했다.

―근면과 오기, 끈기가 있는 성격이시네요.

“그래서 제 별명이 ‘팽이’예요. 채찍으로 치면 칠수록 잘 도니까요. 한번 마음 먹으면 끝장을 보고, 좌절되면 더 강해지는 성격이에요. 홀어머니에 외딸로 태어났으니까, 출세에 대한 강박도 있었고 책임감도 강했죠. 저도 게으름 피우고 싶고, 흐트러지고 싶은데 그건 5분이고 나머진 알차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에요. 하루를 어떻게든 제게 남도록 하는 게 중요해요. 아무것도 안하고 밥을 먹으면 밥한테 미안한 게 저예요.”

―그런데도 미국 LA에서의 ‘소머리 국밥집’ 창업은 대실패로 끝났는데요.

“열심히 해도 안될 때가 있다는 걸 처음 알았어요. 현금만 35억원을 까먹었으니까요. 곤지암에 처음 갔을 때처럼 한번 미지의 땅을 개척하고 싶은 마음에 미국으로 달려간 건데, 하나도 되는 게 없었어요. 미국에서 4년간 헛고생하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졌다’는 패배감과 제 자신에 대한 실망감으로 한참을 울었어요. 한국에 오니, 자신감도 떨어지고 무엇보다 대인기피증이 생겨 사람을 못만나겠더라고요. 그때 남편이 제게 승마와 오토바이를 타보라고 권유하면서 조금씩 나아졌죠.”

―‘배연정’이라는 사람의 진짜 이미지는 무엇인가요.

“사람들은 저를 술도 잘 먹고, 관광버스를 타면 맨 앞줄에서 노는 사람이라고 흔히 인식해요. 실상은 정 반대죠. 관광버스 타면 맨 뒷줄에서 경청하는 스타일이에요. 저를 잘 아는 사람들은 제가 코미디를 할 때, 많이 놀라워했어요. 연예인 생활을 하면서 제 성격을 많이 개조했죠. 소심한 A형 성격이 드러날까봐, 속된 말로 싸가지 없다는 말 듣기 싫어서 ‘나’를 버려야 했어요. 제 인생관은 어디서든 프로가 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배연정은 어린 시절 증조 할머니 밑에서 자랐다. 12세때 증조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외할머니 밑에서 자란 그는 19세가 돼서야 어머니와 같이 살 수 있었다. 장녀였던 어머니는 가장 역할을 하기 위해 딸과 떨어져 살며 한정식이나 중식당을 운영했다. 배연정은 “어릴 때 어머니는 늘 회색빛 얼굴에 일하는 모습으로만 기억됐다”며 “억척 아줌마처럼 살던 어머니를 닮지 않겠다고 그렇게 다짐했는데, 어느새 어머니처럼 살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있다”고 했다. 만약 10일 휴가가 주어진다면 쓸 수 있겠느냐고 묻자, 그는 “이젠 갈 수 있다”며 “저승길 문턱에도 갔다온 내 자신에 대해 상을 주고 싶다”고 웃었다.

―국밥집을 운영하면서도 연극과 뮤지컬, 방송 출연도 간간이 하셨는데요.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는 진리를 깨우친 거죠. 전 제안에 코미디 기질이 숨어 있는지 몰랐는데, 카메라 앞에만 서면 본색이 드러나더라고요. 그런데도 저는 솔직히 정극을 하고 싶었어요. 제가 주로 연극이나 뮤지컬에 출연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예요.”

―코미디가 불편했다는 뜻인가요.

“가수로 데뷔해서 MBC에 홍보하러 갔더니, ‘웃으면 복이와요’ PD가 코미디를 해보라고 권유했죠. 당시 ‘왈가닥 루시’라는 외화가 인기였는데, 그 PD가 ‘요즘엔 노래도 되고, 얼굴도 되고, 춤도 되는 루시 같은 만능 엔터테이너가 대세’라고 말해서 얼떨결에 코미디를 하게 된 거예요. 그렇게 3년을 했지만, 솔직히 저하고는 잘 맞지 않았어요. 그래서 ‘홍도야 울지마라’ 같은 악극이나 ‘수사반장’같은 드라마에 출연하면서 정극 배우로 자리매김하려고 했는데, 시청자들이 저한테서 보는 건 여전히 ‘웃음’이더라고요. 좀처럼 그 이미지를 지울 수 없었죠. 그렇게 코미디언으로 울며 겨자먹기로 살았는데, 때마침 TBC에서 배일집씨와 저를 묶어 ‘신성일·엄앵란’ 콤비처럼 기획을 했어요. ‘고전유머극장’이란 프로그램에서 6년이나 콤비로 활동했죠. 그것때문에 저는 더이상 정극에 나갈 기회를 못 얻었어요.”

―방송에선 ‘은퇴’를 한 건가요.

“제가 ‘오삼불고기’를 기획해서 홈쇼핑에 처음 내놓은 사람이에요. 먹거리만큼은 제 이름을 걸고 신뢰를 쌓아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먹거리=배연정’이라는 등식이 성립될 때까지 열심히 뛰는 게 목표죠. 저를 코미디언으로 모르는 사람이 있나요? 그렇게 각인된 이미지는 쉽게 사라지지 않잖아요. 그러니 ‘은퇴’는 제가 죽어야 시작되는 거예요. 다만 여러분 앞에 흉하게 보이지 않을 때까지 나서겠다는 용의가 있는 거죠. 그 전까지는 ‘조퇴’일 뿐이에요. 제가 정말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건 정극 연기 한번 해보는 거예요. 드라마에 맛깔난 조연 역할로 시청자들에게 인정받고 싶어요.”

배연정은 지난해 ‘소머리 국밥집’ 체인점을 모두 정리했다. 지금은 곤지암 ‘소머리 국밥집’ 하나만 운영하고 있다. 맛의 통일성과 이미지 관리를 위해 내린 아픈 결단이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총 3번의 기회 중 2번을 이미 썼다고 했다. 첫번째는 방송에 입문한 것이고, 두번째는 국밥 장사를 시작한 것이다. 두번째 기회에서 경거망동해 실패라는 큰 교훈을 얻었다는 그는 곧 다가올 마지막 기회를 ‘혼자’가 아닌 ‘함께’ 쓰겠다고 강조했다. “지금까지 번 돈은 제 것이 아니었어요. 제가 실패했을 때 저를 소리없이 도와준 사람들을 보면서 옆과 뒤를 돌아보는 삶이 중요하다는 걸 많이 깨달았죠. 그들과 더불어 사는 삶을 위해 제 마지막 기회를 쓰겠습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가는 길에 한 환자가 그를 알아본 뒤 살포시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배연정이 말했다. “이렇게 돌아다니시면 안돼요. 항상 몸을 따듯하게 하고, 집에선 꼭 휴식을 취하세요. 지금은 괜찮으신 거죠?” 잘난 연예인의 그림자는 이제 없다. 그 자리엔 주위를 둘러보는 관심과 애정의 마음만 있을 뿐. 배연정의 앞으로의 나날도 이럴 것이다.

김고금평기자 danny@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