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한수산/작가

대학을 갓 졸업한 새내기 교사는 젊고 젊었다. 그가 춘천고교 2학년 8반 나의 담임 박병래 물리 선생님이었다. 부리부리한 눈매에 수려한 용모를 가졌으면서 유난히 머리가 컸던 선생님은 부임 첫날 학생들로부터 ‘웬 대가리가 저렇게 크냐’는 불경스러운 귓속말과 함께 ‘뚝지’라는 별명을 얻으셨다.(뚝지라는 민물고기는 몸통보다도 머리가 크다)

매달 발표하는 수업료 납부 성적에서 전교의 꼴찌를 도맡아 하던 게 우리 반이었다. 결코 수업료 내라는 말씀을 한 적이 없는 담임이 질책을 당하는 건 당연했다. 견디다 못한 뚝지 선생님이 “저는 국립사범대에서 학생들에게 돈 걷는 방법은 배우지 않았습니다” 하며 교장한테 대들었다가, 학교 전체가 3학급인 벽지 학교로 쫓겨간 건 그 다음해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0여년이 흐른 어느 날, 신춘문예에 당선된 나에게 편지 하나가 날아들었다. 혹시 그때의 그 학생이 아닌지, 맞다면 연락을 달라는 뚝지 선생님의 편지였다. 놀랍고 기뻐서 찾아간 내게 저녁을 사주시면서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소설가는 싸구려 술 먹으면 안 돼. 비싼 사람이니까 술도 비싼 걸로 마셔야지.” 소설가가 된 제자를 자랑스러워하시며 그날 선생님이 사주신 생맥주를 얼마나 마셨던지… 어떻게 헤어졌는지 기억이 없었다.

그리고 또 몇 십 년…. 내가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을 때였다. 저녁 무렵 어떤 분이 연구실로 들어섰다. 누구시냐면서 어정쩡하게 일어서는 나에게 그가 말했다. “기억하시겠습니까? 나 박병래입니다.”

그때 나는 뚝지 선생님이 내미는 손을 잡으며, 그 품에 안겼다. 어이구, 자네도 어느새 머리가 허옇게 되었군… 하며 내 등을 어루만져 주시던 선생님, 나도 어느새 50대였다. “늘 자네 소식은 신문에서 빠지지 않고 챙겨 봐.” 나는 잊고 있었지만, 선생님은 나를 잊지 않으셨던 것이다.

1643년 일본에 갔던 조선통신사 박안기는 당시 조선의 우수한 천문학을 일본에 전함으로써 일본의 천문학 발전에 밑거름이 된 인물이다. 그가 전한 지식을 바탕으로 일본은 최초의 역법인 ‘정향력(貞享曆)’을 완성하기에 이른다. 집안 선조가 되는 박안기의 평전을 쓰기 위해 선생님은 평생을 글쟁이로 살아온 제자의 도움을 받으러 찾아오셨던 것이다.

선생님이 박안기의 족적을 찾아 일본을 드나들기 시작하면서, 가실 때면 늘 취재 계획을 가지고 나를 찾아 주셨고 다녀와서는 무슨 보고회라도 하듯 일정표를 내보이며 그동안의 일을 설명하곤 하면서… 우리들의 만남은 이어졌다. 그렇게 몇 년, 밀양 박씨 문중의 30여명이 일본으로 건너가 두루마기와 갓으로 의관을 갖추고 박안기가 쓴 친필편액이 걸린 절에서 추모제를 지내기에 이른다. 그 뿌리찾기의 험난한 여정과 노고는 감동 그것이었다.

내가 미국에 가서 1년을 보내고 온 뒤 선생님과의 소식이 끊겼다. 그런 어느 날, 저녁 늦게 집으로 돌아온 나에게 아내가 말했다.

-박병래 선생님이, 2년 전에 돌아가셨대요.

집안을 정리하던 아내가 박안기 관련 자료 박스에서 선생님의 옛 주소를 발견하고 수소문 끝에 알아낸 소식이었다. 40여년 세월이 무너져 내리는 회한 속에,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이 선생님과 함께 식판에 담아 먹던 학교 교직원 식당의 점심이었다.

“어디 찻집에라도 나가실까요?” 하면 “나가긴, 자네가 끓인 커피 줘” 하셨고, 점심이라도 대접하려면 “밖에는 무슨. 학교식당 있지않아?” 하시던 선생님. 제대로 저녁 한끼 대접하지 못하면서도 왜 언제나 선생님이 날 찾아오실 줄 알았고, 내가 이 땅에 살아 있는 그날까지 오래 내 곁을 지켜 주시리라고 믿었단 말인가.

또 5월이 오고, 스승의 날이 머지않다. 여중생이 복장불량을 나무라는 여선생님의 머리채를 낚아채며 폭행했다는 엽기적인 뉴스를 접해야 하는 오늘이지만, 그래도 스승의 날은 온다. 그리고 선생님을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노래들은 5월의 하늘에 울려 퍼질 것이다.

‘스승의 은혜는 하늘같아서

우러러 볼수록 높아만지네

참 되거라 바르거라 가르쳐 주신

스승의 마음은 어버이시다’